이경란 소설가

어릴 적 이모 집으로 몰려가면
며칠이고 먹이고 입히고 재워줘
아이가 유치원서 손 다쳤을 때

병원 데려간 건 나 아닌 내 언니
조카들은 외동이거나 남매여서
어른 돼도 이모가 될 수는 없어


반달가슴곰, 산양, 노랑목도리담비, 스라소니, 수달, 표범, 시베리아호랑이, 늑대. 과천 서울동물원에 있는 우리나라 토종 멸종위기 동물들이다. 한때 번성했다 멸종되어 영화에서 부활한 공룡과 같은 존재감도 없이 쓸쓸하게 사라질지도 모르는 동물들…. 웬 억지냐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멸종위기’ 리스트에 이모를 추가해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최근 읽은 소설가 부희령의 산문집 ‘가장 사적인 평범’에는 ‘관인 이모’에 대한 기억이 적혀 있다.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던 이모의 가슴 아픈 사연이 이어지는데, 그중 한밤에 청량리역 근처의 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길 잃은 이모를 모시러 갔다는 일화가 있다. 작가는 어머니와 함께 택시로 이모를 모셔온 다음 운전을 거부했던 아버지를 향해 ‘당신보다 내가 더 나은 인간’이라는 기분을 느꼈다고 썼다. 고모였다면 상황은 달랐을까? 아무려나, 쓸쓸했던 이모의 생을 톺아본 글이 어쩐지 마음을 휘저었다. 추석을 앞둔 때문이었을까?

백수린의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에도 이모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주인공 해미의 이모는 파독 간호사였다가 의사가 되어 독일에 사는 인물. 해미 가족은 그의 언니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이모가 있는 독일로 간다. 초등학생 해미는 그제야 이모와 처음 만나고, 그 동료 ‘이모’들도 알게 된다. 결핍에 한 발 담그고 있는 이모들이 해미의 세계로 성큼 들어온다. 해미는 기꺼이 이모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 나가며 성장한다.

어린 시절, 이모들만큼 다정한 존재는 없었다. 한동네에 살던 작은이모 집에 가서 우리 집에 없던 TV를 보며 밤늦게까지 놀다 잠든 일은 셀 수도 없다. 아담한 한옥이었던 이모 집 마당에는 처음 본 앙증맞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가에 쪼그리고 앉아 붉은빛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하늘거리던 자태에 홀렸던 기억도 난다. 연못 옆 장독대에서 담장을 넘어가던 나팔꽃도. 집에서는 못 먹어본 맛있는 과자를 먹는 날도 있었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이모부의 흰 머리카락을 뽑아 드리기도 했다. 열 올에 십 원이었나, 용돈을 받기도 했다.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진지했다. 나와 언니들은 경쟁하듯 흰 머리카락을 뽑았다. TV와 물고기뿐 아니라, 흰 머리칼 역시 우리 집에는 없었던 신기한 장난감이었다.



그 시절 큰이모 집은 부산에 있었다. 여름이면 우리 가족은 그리로 몰려갔다. 하루는 해운대, 하루는 광안리, 또 하루는 다대포 하는 식이었다. 동생 부부가 어린 딸들을 올망졸망 매달고 부산에 도착하면 큰이모는 평소 구경도 못 한 진수성찬을 준비해 두고 우리를 며칠 동안 먹이고 입히고 재워 주었다. 유년의 나는 거기서 한동안 살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살림이 푼푼했던 이모가 도시 빈민인 동생의 고달픔을 덜어주기 위해 베푼 호의였다. 덕분에 나의 유년이 덜 단조로웠다. 엄마가 큰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맬 때 병원으로, 우리 집으로, 눈썹 휘날리게 뛰어다니며 어린 조카들을 건사하고 엄마를 간호한 사람도 이모였다.

일상에서 가장 듬직하고 다정했던 이모들은 그러나 명절에는 한걸음 물러나는 존재였다. 차례는 큰집에 가서 지냈고 명절 당일은 거기서 시간을 보냈다. 명절에 이모 집 식구들과 모여 노는 건 언제나 번외 편이었다. 대체로 행사는 뒤풀이가 알속이고 사회생활에서도 공식적 관계보다 비공식적 관계가 애틋하기 마련. 번외 편은 새벽까지 끝날 줄 몰랐고, 우리 자매는 이종사촌언니·오빠·형부들에게서 고스톱을 처음 배웠다. 동네마다 성업 중이던 ‘이모’ 분식에서 먹은 떡볶이와 라면은 또 무려 몇 그릇이던가! 세상의 위대한 이모들이여!

오래전, 직장생활을 할 때 언니가 아이를 돌봐준 적이 있다. 하루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손바닥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는데, 언니가 병원에 데려가 상처를 꿰매고 왔다. 언니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 내게 전화해 차분하게 알려주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오지도 못하면서 애면글면할까 봐 라고 말했다. 사무실에서 화장실로 달려가 오래 울었다. 이모로서의 사랑과 언니로서의 배려가 사무쳤던 것 같다. 자신의 아들과 동갑인 내 아이를 데리고 놀이교육센터에 가서 내 몫까지 고스란히 두 세트를 하고 몸살이 난 사람도 아이의 이모이자 내 언니였다. 고맙고 자랑스럽다.

물론 이런 이모가 없어 ‘이모’로 통칭 되는 돌봄 인력의 도움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도 있다. 언니가 다른 도시로 이사 간 뒤 내 아이도 그랬다. 한 달짜리 이모도 있었고, 사흘짜리 이모도 왔다 갔고, 6개월짜리 이모도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이모’ 복이 없을까 하고 푸념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들도 ‘이모’였다.

내게는 아직도 끈끈하게 이어진 90대의 이모가 두 분 계신다. 나 또한 조카들에게 네 명의 이모 중 한 명이다. 그런데 네 이모로부터 사랑받는 아이와 조카들은 아무도 이모가 될 수 없다. 두 집은 외동딸을 두었고, 두 집은 딸 하나 아들 하나, 한 집은 아들만 둘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비혼주의자도 있다. 이러니 ‘멸종위기’ 목록에 이모를 추가해야 한다는 말이 억지만은 아닐 것이다. 연로하신 세 자매, 이모들과 어머니의 건강을 한가위 보름달에 대고 기원하다 부려 보는 해찰이긴 해도 말이다.

이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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