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 전기료 덕 ‘요금 폭탄’ 피해 원가 이하 전력 공급 지속 못 해 한전 빚더미, 송전망조차 지체
금융시장 한전債 충격 악순환 AI용 대규모 전력 확보 초비상 절전 생활화와 전력망法 절실
유례없는 폭염이었지만, 그래도 ‘전기요금 폭탄’ 같은 소동 없이 지나가고 있다. 지난달 전기 사용량이 9% 증가해 주택용 전기요금은 가구당 평균 6만3610원으로 13%(7520원) 올랐다. 8월은 평균 최대 전력 수요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던 이례적인 시기였다. 이만한 게 다행이다.
무엇보다 주택용 전기요금이 세계적으로 싼 덕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다섯째로 싸다. 그렇지만 한국전력은 23일 4분기 연료비 단가를 동결했다. 8월 전력 사용량은 일본·프랑스라면 요금이 한국의 2배를 넘고, 미국은 2.5배, 독일은 2.9배 많다는 게 한전의 분석이다.
낮은 전기료는 양면성이 있다. 가계에 도움이 되는 만큼 한전 부채는 눈덩이처럼 커진다. 정부가 2022년 이후 전기료를 여섯 차례 올려 한전은 작년 3분기부터는 연결 기준으로는 흑자다. 원유가 등 원가 인하 효과도 보고 있다. 그러나 누적 부채가 워낙 많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한전은 이를 위해 지난해 kWh당 51.6원의 인상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제까지 인상액은 21.1원에 그친다. 문재인 전 정부가 원가가 가장 싼 원자력발전을 틀어막으면서 “전기료 인상은 없다”는 이율배반적인 허언을 밀어붙여, 전력을 원가 이하로 공급한 것이 결정적이다. 올 6월 말 기준 한전의 누적 부채는 203조 원에 달해 하루 이자만 123억 원이나 된다. 기획재정부는 부채를 올해 206조 원, 2028년 228조 원으로 전망한다.
빚더미의 여파는 심각하다. 한전은 송·배전망 구축에 올해부터 2028년까지 총 52조6000억 원을 투자해야 하지만, 부채에 발이 묶였다. 전력을 생산해도 수도권 등으로 보내지 못할 형편인 것이다.
금융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한전은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을 상환하기 위해 다시 대량의 채권을 발행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올해 말까지 만기인 채권이 10조3000억 원이나 되니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한전 채권은 2022년 10월 레고랜드 사태와 맞물려 간판 기업의 자금줄까지 막을 정도로 금융 쇼크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전 채권이 당시 총 29조 원에서 지금은 10조 원 수준으로 줄었지만, 연말마다 금융 비상이 걸리는 악순환을 방치해선 안 된다. 특히, 금융통화위원회가 내달 기준금리를 내려도 쏟아지는 한전 채권에 시장 금리가 올라가면 헛일이다.
전력은 인공지능(AI)시대의 핵심이다. 현재 한국의 하루 최대 전력공급 능력은 태양광까지 포함해도 104.3기가와트(GW)다. 지난달 최대 소비는 100GW를 웃도는 날이 빈번했다. 정부에 따르면 2028년 최대 전력 수요는 107GW이다. 불과 4년 뒤 2.7GW가 부족하다. 여기에 AI 확산으로 반도체·데이터센터 등의 전력 수요가 급팽창할 전망이다. 지난 5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시안은 2038년 수요가 2023년보다 30.6GW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게다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만 2050년까지 10GW의 신규 전력이 필요하다. 정부 계획대로 1.4GW짜리 원전 3기를 새로 건설해도 턱없이 부족하다. 전력 확보는 전 세계에 공통적인 과제다. 탈원전을 선도했던 이탈리아·오스트리아·스웨덴 등 유럽도 수십 년 만에 원전으로 속속 복귀하는 정도다.
전력 생산 확대뿐만 아니라, 송전·소비까지 전반적인 수급 체계 재정비가 시급하다. 새 시대를 따라가려면 정부·국회·지방자치단체·기업·가정 모두 과제가 수두룩하다. 당장 정부는 이미 수년 지체된 동해안∼신가평 초고압직류송전선, 호남∼수도권 간 서해안 해저사업 등을 서둘러야 한다. 하남시 등 일부 지자체의 변전소 증설 반대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해 차질을 해소해야 한다. 국회는 국가 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부터 빨리 처리해야 한다. 기업은 물론 일반 가정도 절전의 생활화가 긴요하다. 이제처럼 펑펑 쓰다간 전력 부족 사태를 맞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일본 등의 반값도 안 되는 가정용 전기요금의 정상화는 필수다. 농업·제조업 등 산업용 전기료도 개혁해야 한다. 올 4분기는 선거와도 무관한 만큼 적기다. 정부가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찔끔 인상으로 미봉해선 안 된다. 개혁 차원의 결단이 필요하다. 진정성을 갖고 국민의 이해와 동의를 구해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