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연료 수출 제한 시사 푸틴 美 의회와 정부는 철저히 대비 한국은 베짱이처럼 마냥 방치
자체 연료 생산해야 원전 강국 경제안보시대여서 더욱 절실 尹 우라늄 농축 시설 주도해야
우크라이나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가 농축우라늄 등 전략 원자재 무기화에 나설 조짐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11일 서방 진영의 대러 제재를 비판하면서 “세계 시장에 공급하는 우라늄과 티타늄, 니켈 등의 제한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자유 진영이 소프트웨어 및 통신 장비, 생화학무기 재료 등 전략물자 대러 수출 금지를 한 데 대한 보복 차원에서 원전 연료 수출 통제에 들어갈 수 있음을 예고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전쟁은 교착 상태지만, 경기 호전 덕분에 버틸 여력이 있다고 판단한 푸틴이 이제 본격적으로 원전 연료 수출 제한 등을 무기로 서방 진영을 압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푸틴의 전략 광물 수출 제한 시사와 관련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도 “러시아산 원전 연료에 의존하는 서방 국가들의 원전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 국영 로사톰은 세계 최대 농축우라늄 회사로, 글로벌 원전 연료 수요량의 3분의 1을 제공한다.
푸틴의 원전 연료 무기화 가능성은 예견됐던 일이다. 미국과 EU는 2022년 러시아산 석유 수출 금지와 함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러시아 은행 축출 조치를 할 때 농축우라늄 수출은 예외로 했다. 갑자기 금지할 경우 각국 원전 가동에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전 26기를 가동하는 우리나라는 연료 34%를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93기를 가동하는 미국도 연료 20% 이상을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이후 한미 양국 대응은 개미와 베짱이를 연상시킨다. 미국은 ‘로사톰 무기화’에 대비해 개미처럼 부지런히 움직였다. 의회는 지난해 말 러시아산 원전 연료 수입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으로 지난 5월 발효된 이 법에 따르면 러시아산 농축우라늄 수입 금지는 2028년까지 유예된다. 이 기간에 자체적으로 원전 연료를 생산할 수 있도록 우라늄 농축 공장 재가동용 정부 보조금도 지원한다. 이에 따라 올 상반기 러시아에서 수입한 원전 연료는 지난해 대비 30%가량이 축소됐다.
한국은 무사안일한 베짱이 같다. 국회는 러시아의 원전 연료 수출 통제에 대비하기 위한 입법을 방기했고, 정부는 푸틴 눈치를 보며 원전 연료를 계속 수입했다. 러시아의 수출 통제에 대비해 정부 방침을 마련한 뒤 한미원자력협정에 근거해 미국 측에 우라늄 안정적 확보를 위한 한미원자력고위급위원회 소집을 요구하는 게 정상이지만, 대통령실도 외교부도 나서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카자흐스탄 방문 때 발표된 공동성명에 ‘안정적인 우라늄 공급 합의’가 명시된 게 유일하게 눈에 띌 뿐이다.
윤 대통령은 최근 체코 방문 때 “팀 체코리아(Czech-Korea)가 되어 원전 르네상스를 함께 이뤄 나가자”고 했다. 한·체코 원전동맹은 “원전생태계 전 주기에 걸쳐 이뤄질 것”이라고도 했다. 원전생태계 완성을 위해선 원전 설계에서 원자로 건설, 주기기 공급 및 원전 가동 및 유지 보수는 물론이고, 연료 생산까지 일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우라늄 채광에서 농축, 원전 가동, 방사성 폐기물 처리 등 전 과정을 연결하는 핵연료주기(NFC)를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우라늄 농축을 못 해 전량 수입해 가공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원전생태계는 불완전하고 NFC도 구멍이 뚫어진 상태다.
원전 강국 러시아와 중국, 프랑스는 자체 우라늄 농축 공장을 갖고 원전 연료를 만든다. 미국도 값싼 러시아산 등에 의지하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간 방치됐던 농축 공장 재가동에 들어갔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최근 원전 연료 공급 계약을 한 센트루스가 바로 그 회사다. 정부와 국회가 손을 놓고 있으니 기업이 자구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원전 강국이 되려면 원전 연료 자체 생산이 필수다. 아랍에미리트(UAE)에 이어 체코, 나아가 유럽·아시아 각국에 원전을 수출하기 위해선 윤 대통령이 임기 내 그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원전 르네상스가 가능하다. 경제안보 시대다.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도 우라늄 농축 시설은 긴요하다. 이것만 잘해도 윤 대통령은 원전 강국의 길을 연 지도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