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아베 신조 식 정치를 비판해 온 일본 자민당 내 비주류 이시바 시게루 후보가 아베 노선의 계승을 내건 다카이치 사나에 후보를 꺾고, 1일 제102대 총리에 취임했다. 우경화 현상이 지배적이던 일본 정치의 변화 여부가 주목된다.
‘탈(脫)아베’를 표방하는 이시바도 기본적으로는 보수파 정치인이며, 안보 정책에서는 비둘기파가 아니라 매파에 속한다. 그가 아베나 다카이치와 다른 점은 일본의 과거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 인식이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해야 한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그를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일본에서 ‘한국때리기’가 횡행할 때였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원칙을 지키려는 정치인의 기백이 느껴졌다.
총재 선거 직전이던 지난 8월 출마 선언으로 펴낸 저서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병합이 얼마나 상대국의 국민적 자부심과 정체성에 상처를 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일·한 간의 진정한 신뢰 관계는 쌓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현재 일본 상황에서는 용기가 필요한 발언이다.
그러나 이시바를 단순히 ‘친한파’로 치부한다면 안이한 생각이다. 아베나 다카이치를 이념적 보수라고 하면 이시바는 현실주의적 보수다. 과거를 미화하는 역사 수정주의와 같은 감성적 요인을 배제하고 일본의 국익만을 중심에 두고 냉철하게 판단하려는 입장이다. 대외정책의 전반적 틀도 철저한 리얼리즘에 입각해 있다. 중국과 북한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항하는 아시아판 나토(NATO)를 제창하는 한편, 미·중 간의 신냉전 체제에 갇히기를 거부하면서 중·북과의 대화 필요성도 강조한다.
대중정책과 관련해서는 저서에서도 ‘억제력과 외교력’이 동시에 필요함을 역설했다. 총재 선거공약으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의 발판으로, 도쿄와 평양에 상호 연락사무소 설치를 제안하기도 했다. 지난해에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추진했던 대북 접촉 노력을 계승할 뜻을 시사한 셈이다. 대중 및 대북 정책에서 한국과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경우도 적잖게 나타날 것이다.
그는 일본의 지역안보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한·일 협력 강화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그는 저서에서 ‘일·한 관계 개선을 위해 윤석열 대통령이 내린 결단에 대해 일본이 성실하게 응답해야 한다’고도 했다. 새 총리로서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이라는 제약을 넘어 자신의 말을 어느 정도 실천할지 주목된다.
내년 6월의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공동선언 2.0’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시바 정권으로서는 내년 7월 말의 참의원 선거 승리가 안정 기반을 확보하는 관문이다. 일반적으로 선거를 앞두고는 외교적 양보가 어렵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한 축인 ‘과거 직시’에 실질적 내용을 담기 위해서는 선언 공표의 타이밍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현실주의적 보수파로서 이시바 총리는 대외정책에서 미일동맹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일본의 독자적 공간을 넓히려는 지향성이 강하다.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서는 현재의 신냉전 구도가 변화할 가능성도 있다. 이시바 정권의 ‘자주외교’ 행보가 한국에 미칠 복합적 영향에도 다각으로 대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