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 안의 우생학
김재형 등 지음│돌베개
우생학을 한국 근현대사의 키워드로 다시 읽어내는 책이다. 통상 우생학은 서구 문화, 특히 독일 나치즘의 한 양상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우생학이 한국에서 자리를 잡은 지는 한 세기도 넘었다. 여전히 법조문에 명기돼 있을 뿐 아니라, 갖가지 사회 이슈를 들여다보면 우생학의 흔적이 짚인다. 철학·의학·과학 등을 오가며 8명의 저자가 우생학에 대한 각자의 연구를 한데 모았다.
우선, 우생학은 진보주의로 분류되는 경향에서도 나타난다. 일본 출신 연예인 후지타 사유리의 출산에 따른 소위 ‘초이스 맘’에 대한 관심을 들여다보자. 결혼하지 않고도 정자은행에서 기증받은 정자로 엄마가 된 그를 응원하는 이가 많았다. 결혼에 구속되지 않고도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초이스 맘’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파트너를 만나 자연스러운 사랑과 결합의 과정을 거쳐 우연적으로 얻게 되는 과실이 아니라, 철저히 스스로 의지에 따라 계획되고 선택된 최상의 결과물이다.” 정자 제공자의 외모 수준, 학력 등 정보를 제공하는 정자은행에서 ‘인기 정자’는 금세 완판된다는 사실이 저자의 결론을 뒷받침한다.
우생학의 본질은 ‘앞으로 태어날’ 인간 신체에 대한 조절과 통제다. 그 수단은 인간 지능과 체격 등의 계량화이고, 그 기반이 되는 과학은 애초 이념의 성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 책은 이른바 ‘가족계획사업’의 결과 강제 불임수술로 내몰렸던 장애인, 한센병 환자에 대한 강제 단종·낙태 등 역사의 기저에 있는 우생학을 끌어낸다.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하는 현행 모자보건법이 그 증거다. 제정 당시 한센인 여성의 낙태를 제도화했던 이 법률 조항은 올해 2월 일부 개정에서도 유지됐다.
우생학이 한국에 들어온 계기는 일본의 식민 지배였다. 민족 발전을 위한 방법으로서 우생학이 소개됐다. 1933년 ‘조선우생협회’를 창립했던 여운형·윤치호·이광수 등 명단에는 좌우 성향이 총망라됐다. 당대 여성주의자 그룹까지 ‘우량 자녀’만 낳는 것을 여성 해방과 결부시키며 우생학을 적극 수용했다. 지난 100년여간 우생학은 주요 국면마다 등장했다. “우생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첫걸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320쪽, 1만9000원.
서종민 기자 rashom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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