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인공지능(AI)시대’다. AI가 인도할 기회의 신대륙은 아직 요원하나, 이 신기술이 보여주는 놀라운 잠재력에 수많은 탐험가와 자본이 앞다투어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대가 우리에게 축복이 될 것이라 단언할 수 없다. 지난 ‘대항해시대’를 돌이켜보면, 소수의 유럽 열강만이 막대한 부를 독점했고, 대부분 국가는 식민지로 전락해 오랜 수탈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또, 산업혁명부터 인터넷, 모바일 시대의 전환기를 되돌아보더라도 기술 패러다임이 바뀌는 변곡점의 시기에는 언제나 준비된 주체들만이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막 시작된 ‘대인공지능시대’에 대한민국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다양한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그리고 각각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시급히 준비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바로 AI 컴퓨팅 인프라의 구축이다. 물류산업이 도로와 항만 등 교통 인프라 위에서 성장할 수 있었고, 인터넷 산업이 정보기술(IT) 및 통신 인프라 구축 후에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처럼, AI 개발과 서비스를 위해서는 AI 컴퓨팅 인프라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 특히, 초거대모델(LLM)로 대표되는 현재의 AI 기술은 막대한 컴퓨팅 파워를 필요로 하기에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AI 컴퓨팅 인프라 없이는 AI 기술을 개발할 수도, 개발된 AI 서비스를 공공과 산업에 적용할 수도 없다. 또, AI 컴퓨팅 인프라 원천기술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외국산에만 의존하게 된다면 대한민국 AI 산업 전체가 글로벌 공급망에 종속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경제안보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개별 기업들이 독자적으로 인프라에 투자해 해외 빅테크 기업들과 경쟁하기에는 우리 자본시장 규모와 인력 풀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AI 컴퓨팅 인프라 투자에 있어서는 여러 기업이 연대하고, 민관이 하나가 돼 국가적 협업을 이뤄내야 한다. 우리는 작은 나라라 중복 투자를 피하고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위한 인프라 협력이 필수적이지만, 아무리 작더라도 대한민국은 테슬라나 구글 등 개별 빅테크 기업보다 큰 규모를 지닌다. 국가 전체가 역량을 결집해 하나로 뭉칠 수 있다면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국내 AI 반도체 산업계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AI 데이터 센터 구축과 운영의 핵심인 AI 반도체 분야에서 SK그룹이 투자한 사피온과 KT, 카카오가 투자한 리벨리온이 합병을 추진하며 AI 반도체 산업의 국가적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총력전에 돌입했다. 이는 엔비디아뿐 아니라 수조 원의 기업가치에 육박하는 미국 AI 반도체 스타트업들과의 경쟁을 위해 대한민국 민간 기업들이 힘을 합친 결단으로, 블룸버그 등 외신에서도 의미 있는 움직임으로 평가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도 ‘K-클라우드’ 전략과 디지털 플랫폼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통해 국산 AI 반도체 생태계 확장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엔비디아가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의미 있는 규모의 상업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이런 기업 간의 연대와 민관 협업이 필수적이다. 지난 9월 26일 ‘국가인공지능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민관이 함께하는 강력한 컨트롤타워가 생긴 만큼, 사피온-리벨리온과 같은 기업 간의 연대를 위한 정책적 지원이 더욱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