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훈 논설위원

한국고등교육재단 50년 역사
선대회장의 人才報國 재조명
“물려줄 재산은 지적 재산”

경제대국 기대는 성취했지만
지적 역량 부족하고 정치 캄캄
21세기형 인재육성 혜안 절실


“내가 물려주고 싶은 재산은 물적 재산이 아니라 지적 재산이다. 지식이 있으면 재물은 따라온다. 지식 없이 재물만 있다면 그 재물은 오히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SK 선대회장 최종현(1929∼1998)의 말이다. 장남 최태원 SK 회장은 아버지의 1주기 추모식 때 “선친은 지식의 필요성을 가르쳐주셨다”며 이를 되새겼다. 차남 최재원 SK 수석부회장은 “아버지는 저녁 자리에서 토론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저 집안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늦은 밤까지 계속될 때가 많았다”고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수학, 과학부터 사회문제까지 죄다 나왔다. 아파트만 짓는 건 문제 아니냐, 왜 디지털이 더 좋은 것이냐. 당신의 철학,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도 말씀해주셨다.” 최종현이 사업보국(事業報國)과 더불어, 인재보국(人才報國)의 길을 닦았던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들이다.

최종현은 “나무를 키우듯 인재를 키워야 한다”더니 나무부터 시작했다. 1972년 서해개발(현 SK 임업)을 설립했는데, “나는 땅 장사꾼이 아니다”며 수도권에서 먼 황무지들만 사들여 호두·자작나무 등을 심었다. “그 나무들이 자라 30∼40년 후 거목이 되고 하루에 1원씩만 벌어주면 세계적 대학을 세울 수 있겠다”고 했다. 그 숲이 현재 남산의 40배다. 나무가 돈이 될 때까진 기다려야 하니 1974년에 사재를 들여 인재림(人才林),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세웠다. 국비 유학보다 3년이나 앞섰던 장학생 선발의 파격적인 조건이 화제였다. 염재호 태재대 총장(전 고려대 총장)은 “아무런 조건 없이 등록금과 5년 동안 생활비를 보장해줬다. 이상한 종교단체나 중앙정보부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했다”고 한다. “장학생 한 명이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지원받은 돈이 당시 선경 신입사원 25년 치 봉급이었다.”(김용학 전 연세대 총장) 지금까지 국내외 5000여 명의 장학생을 지원했고, 100명 배출이 목표였던 박사는 1000명을 바라본다. “기업 경영에서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다” “능력을 키워주는 방법은 책임을 지우는 길이 제일 빠르다. 책임 없는 간부는 자라지 않는다” 등의 어록과 함께 등장하는 ‘인재경영’ ‘지식경영’은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기르고 육성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는 한마디로 설명될 듯하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지만, 인재 육성은 물적 자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등교육재단 설립 때의 혜안이 놀랍다. “우리나라가 지금은 변방의 후진국이지만 인재양성 100년 계획에 따라 고도의 지식사업사회를 목표로 일등 국가, 일류 국민으로 발전해 나가면 기필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원 빈국에 자본주의 경험도 일천한 이 나라는 그때쯤이면 지적 역량이 모자라 발전이 더딜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세계적 학자를 키워야 한다”고 했다. 그의 기대와 우려는 50년이 지났을 뿐인 지금, 현실이 되고 있다. 그새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56배로 늘었고, 34위였던 세계 순위도 11∼14위를 오가는 경제 대국이 됐다.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으니 국가 위상도 상전벽해다. 하지만 의대 열풍 앞에 ‘과학기술입국’은 빛이 바래고, 인재난을 걱정하는 처지다. 초저출생·고령화의 인구 구조 변화로 잠재성장률이 급락해 실제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를 해결해야 할 정치 리더십은 진영 양극화로 국가적 과제에 대한 숙의와 이행에 되레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21세기에는 정치논리를 극소화하고, 경제논리와 조화시켜 나가느냐에 한국 기업의 앞날이 달려 있다”(1999년)는 경고마저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다.

고등교육재단은 다음 달 26일 창립 50주년 행사를 갖는다. 최태원 회장은 이와 관련한 간담회에서 “현대 사회가 원하는 인재가 바뀌었다고 본다”고 했다. “문제를 발굴하고, 협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토털 솔루션을 내놓는 사람이 인재다” “변화가 빨라서 어떻게 예상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잘 대처하느냐가 중요한 시대” “이 역시 가설이고,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인재보국만이 아니라 사업보국(유산의 그늘까지도)에 대한 고민으로도 읽혔다. 산업계 전반의 고민이자, 우리 사회의 숙제일 것이다.

오승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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