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진영은 러 승리 저지할 것 한국의 적극적 관여 명분 커져 북한 장병에 실상 깨닫게 해야
11·5 미국 대선을 코앞에 두고 이뤄진 북한의 러시아 파병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인식을 순식간에 전환시켰다. 더는 먼 나라의 비극적 사태가 아니라 한반도 미래와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전쟁이 된 것이다. 북한 김정은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운명공동체를 자임함으로써, 러시아는 순식간에 북한에 이어 대한민국 ‘제2의 주적(主敵)’이 됐다. 러시아 2중대를 자처한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얻은 탄도미사일 등의 실전 데이터와 전투력은 곧바로 한국에 비수가 되기 때문이다.
2022년 2월 러시아 침공 후 우크라이나인들이 항복 대신 항전을 지속하자 미국 스탠퍼드대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후퇴 조짐에 있던 글로벌 민주주의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군, 시민이 똘똘 뭉쳐 푸틴식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데서 민주주의의 희망을 본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푸틴의 침공이 역사적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했다. 이런 기대감 덕분에 세계 각국에서 우크라이나 모금 운동이 이어졌다.
전쟁을 치르면서 우크라이나는 한국에 주목했다. 지난해 5월 고등학교 지리 교과서에 이어 지난 8월 세계사 교과서엔 6·25전쟁 후 최빈국이던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한강의 기적’이 소개됐다. 자연 자원도 없고, 토양도 척박한 가난한 나라가 경제 기적과 민주주의를 이룬 것은 교육열과 성실성 덕분이라는 내용도 실렸다. 전쟁 폐허에서 경제를 일군 한국을 롤 모델로 삼아 국가적 시련을 이겨내겠다는 의지다. 반면, 북한에 대해선 ‘악질적이고 반인류적인 정권’이라고 기술했다.
김정은이 대규모 포탄 지원에 이어 병사들까지 러시아에 제공한 것은 반대급부로 핵·미사일 첨단 기술을 확보하려는 욕심 때문이겠지만, 러시아에 맞서면서 제2의 한국을 꿈꾸는 우크라이나도 체제에 위협적이라고 봤을 수 있다. 김여정이 지난 22일 무인기 도발을 한국 탓으로 돌리면서 “핵보유국을 상대로 감행한 도발 사례는 한국과 우크라이나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그런 기류가 읽힌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남북한 경제적 격차 연구자들이 받은 데서도 입증됐듯이, 한국은 성공 모델이고 북한은 실패 모델이다. 제임스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교수와 다론 아제모을루 MIT 교수는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한국은 포용적 제도로 경제를 성장시켰지만, 북한은 착취적 제도로 경제를 정체시켰다’고 했다. 김정은이 핵·미사일에 집착하면서부터 경제는 더욱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4월 미 의회 연설 때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당시 일본 총리는 “오늘의 우크라이나가 동아시아의 내일이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에게 우크라이나는 이제 발등의 불과 다름없다. 윤석열 정부는 그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 무기 지원 대신 미국에 포탄을 수출하는 형식으로 지원해왔다. 전쟁 이후 대러 관계와 푸틴 심기를 고려한 실용적 접근으로 보이지만, 한국 외교의 고질적인 러시아 공포증 표출일 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한·러 관계가 전쟁 전 상태로 정상화하기도 어렵다. ‘마리우폴의 영웅’인 아조우 여단장 보흐단 크로테비치는 최근 엑스(X) 계정에 북한 파병에 대해 ‘소련에 의해 세워진 북한 체제를 종식시키고 남북 분단을 끝낼 기회’라는 글을 올렸다. 파병은 러시아와 북한의 절박성을 보여주는 증거이고,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이 한반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만큼 한국이 역발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대규모 파병으로 북·러가 군사적으로 한 몸이 된 만큼 푸틴의 승리 저지가 곧 김정은을 굴복시키는 길이다. 윤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방어 무기에서 공격 무기로 확대해야 한다. 전후 복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힘을 소모시키면서 북한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도 긴요하다. 러시아 용병으로 전락한 북한군이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체제의 한계를 자각, 자유세계를 선택하도록 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파병 군인들이 김정은 체제에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북한 변화도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