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논설고문

삼성전자가 동네북 신세다. 시스템 반도체는 설계부터 밀리고, 파운드리(위탁생산)에선 TSMC에 게임이 안 된다. 주력인 메모리에서도 첨단 고대역폭메모리(HBM)는 SK하이닉스에 뒤처지고 중저가 D램에선 중국의 추격이 거세다. 주가가 ‘5만 전자’로 가라앉은 것은 이런 총체적 난국의 결과다. 불길은 이재용 회장까지 번졌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빈정거림에다 지난 10년간 자본수익률이 뚝 떨어졌다는 보도까지 나온다.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시달릴 동안 삼성에는 재무 출신이 득세했다. 재무·회계 출신들은 콩을 센다는 ‘빈 카운터스(Bean-Counters)’가 별명이다. 모든 문제에 숫자로 접근하고 단기 수익률만 따진다는 냉소적 표현이다. 삼성도 쉬운 길만 골라 갔다. 예를 들면, 30조 원의 설비투자를 나눌 때 “2차전지에도 3조 원을 달라”는 삼성SDI 의견은 무시됐다. “LCD처럼 언제 중국에 먹힐지 모르는데, 차라리 기대수익률이 높은 D램에 집중하자”는 논리였다. 2019년 김기남 부회장 시절 “돈이 안 된다”며 HBM을 접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기술자보다 ‘양복쟁이’들이 설치면서 망조가 든 미국 인텔·보잉과 닮은꼴이다. 탁월한 제품보다 비용 절감이 우선됐다.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으로 결정적 선택을 해야 위대한 기업이 탄생한다. 엔비디아는 2019년 3월 이스라엘의 멜라녹스를 69억 달러(약 8조 원)에 인수했다. 그 네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생태계를 구축해 인공지능(AI)의 제왕에 올랐다. 애플도 삼성전자에 맡기던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독자 개발하기 위해 2009년 짐 켈러의 팰로앨토(PA) 반도체를 2억8000만 달러에 사들였다. 직원 150명의 이 작은 회사가 저전력·고효율의 AP를 개발해 아이폰 신화를 완성했다.

요즘 삼성전자에는 ‘초격차’는 사라지고 사방에서 경쟁력 상실을 걱정하는 소리만 들린다. 위기의식도 예전 같지 않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제동을 걸지 않았으면 생존조차 위험했을지 모른다는 비난까지 쏟아진다. 삼성전자가 30여 년 만에 맞는 대(大)굴욕이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릴 때다. ‘1등도 졸면 죽는다’는 게 이번에는 빈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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