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립습니다 - 성천 류달영(1911∼2004) 선생 20주기에 <하>하>
나는 류달영 선생이 가졌던 다양한 분야에서의 놀라운 성취보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과 그가 가진 결함은 무엇이었는지 더 궁금하다. 그에게 타고난 능력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사람이 다 류달영 선생처럼 그렇게 많은 성과를 내지는 않는다. 특히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공적 성과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는 6·25전쟁의 피란 중에 5세 된 막내딸을 잃었고, 또 전쟁 후 혼란기에 9세 된 둘째 아들을 잃었으며, 국무총리급의 재건국민운동 본부장 재직 중에는 10세의 막내아들을 잃었다. 세 번이나 겪은 자식 잃은 그 슬픔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이러한 슬픔만 있었을까. 이것 말고도 그의 생애 구석구석엔 분명 우리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어둠이 있었으리라.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1961년 어느 여름날, 5·16 혁명정부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간곡히 요청함으로써 이뤄진 ‘재건국민운동’이다. 이 운동은 성공적으로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혁명정부의 민정 이양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고, 정치군인들에 의해 그의 국가적 비전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그의 재건국민운동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혹자는 그가 군부에 협력한 것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그가 혁명정부에 협력한 것은 어디까지나 민정 이양의 약속이 유효한 것으로 기대되던 시기까지였고,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그는 과감하게 본부장직을 내놓았다.

그는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새 역사를 위하여’에 제시한 비전을 완수하지 못했지만, 2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국가재건운동의 수장으로서 그가 닦아놓은 국가재건의 기초작업은 이후 새마을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길잡이가 되었다. 나아가 그 새마을 운동은 대한민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용인술과 이후 대통령 박정희가 이룬 경제 발전 업적의 이면에는 류달영 선생이 제시한 전후 대한민국의 비전과 구체적인 실행이 있었다. 류달영 선생의 거시적 안목과 분명한 방향성을 가진 국가적 비전의 제시가 없었다면, 그리고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사심 없이 시대정신에 따른 그의 결단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이후에 대한민국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과연 이만큼의 성숙을 이룰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 점에서 그는 삶의 매 순간 최선을 선택했고, 그것은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사회 곳곳에서 뚜렷한 성과로 증명되고 있다.
나는 가끔 마음의 귀를 열어 듣는다. 그가 세운 재단에서 일하는 나에게 그가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그의 말에 마음을 기울이다 보면 그는 사후에도 대한민국을, 그 국민을, 이 사회를, 자라나는 새 세대를 여전히 염려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움은 알고 있던 누군가를 오래 보지 않아서 다시 보고 싶은 마음만 뜻하는 건 아니다. 어떤 존재가 매우 필요하거나 없어서 아쉬운 마음도 그리움의 정서다. 그 점에서 오늘날 나는 그가 눈물겹도록 그립다. 조국 독립과 전쟁의 폐허지에서 다시 일어서고자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합심하던 그 시절과는 너무도 다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양극단으로 치달으며 분열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그를 이 시대로 다시 불러오고 싶다. 류달영 선생이라면, 이 시대의 문제들에 어떻게 응답할까? 그는 어떠한 역사의식과 문제의식으로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하게 될까? 1951년에 그가 쓴 ‘새 역사를 위하여’를 2024년에 다시 쓴다면, 어떤 내용이 되어야 할까?
윤수민(성천문화재단 아카데미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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