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논설고문

中은 포위망 뚫고 반도체 굴기
美는 AI·반도체를 전략 자산化
TSMC “엄중한 도전 다가온다”

K-반도체와 기업도 같은 운명
한국 경제 전체 뒤흔드는 도전
위기의식 느슨한 게 진짜 위기


요즘 삼성전자 속사정을 알고 싶으면 인터넷 댓글을 보면 된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도 그룹 수뇌부를 실명으로 저격하는 성토 글이 넘쳐난다. 재무통 ‘서초 라인’, HBM(고대역폭메모리) 사업부를 폭파한 전 CEO, 특정 대학 출신들의 득세까지 마구 폭로한다. ‘삼성전자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서초동 라인 보고 예시’는 SNS 성지순례 코스가 됐다. 회사 측은 특정인 이름을 지우느라 진땀을 흘린다지만, 소용이 없다. 외국계 금융회사는 ‘허약한 반도체 거인’이라 조롱한다.

하지만 한국 경제 전체를 보면 삼성전자의 실적 쇼크는 SK하이닉스의 실적 서프라이즈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 기업들끼리 HBM 시장을 놓고 싸우는 제로섬 게임이다. 진짜 공포스러운 대목은 따로 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와 미국 대선이다.

지난 16일 ASML 주가가 16% 폭락한 것은 중국발 쇼크였다. 미국의 금수 조치로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던 대중 반도체 설비 수출이 반 토막 난 것이다. 이뿐 아니다. 한국 반도체의 대중 수출 비중도 지난해 51%에서 37.9%로 떨어졌고 대만의 TSMC도 20%에서 10%로 곤두박질했다. 문제는 이런 전방위 포위 작전에도 중국 반도체가 잡초 같은 생존력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화웨이는 지난해 7나노 첨단 칩을 장착한 스마트폰으로 충격을 던졌다. 지난 26일에는 화웨이의 인공지능(AI) 프로세서에서 TSMC 칩이 적발됐다. 중국이 60조 원의 보조금을 퍼부으며 불법적인 수법까지 총동원해 반도체 총력전을 펴고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변화는 미국의 태세 전환이다. 반도체는 1997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정보기술협정에 따라 무관세로 수출입이 이뤄지는 자유무역의 상징이다. 전자 제품에 필수적인 기초 소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그 직전 1986∼1996년의 미·일 반도체협정은 매우 거친 통상 마찰이었다. 미국은 슈퍼 301조까지 휘두르며 세계 시장의 80%를 장악한 일본 반도체 산업을 10년 만에 회생 불능 상태로 몰아넣었다.

지난 24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처음으로 ‘AI 국가 안보 각서(NSM)’에 서명한 것은 반도체 시계를 1986년으로 돌리려는 게 아닌지 불길한 징조다. AI를 핵무기와 같은 반열에 올리면서 덩달아 AI용 반도체도 더는 자유무역 상품일 수가 없다. 세계 패권을 좌우할 최고의 전략 자산이 돼 버린다. 뉴욕타임스도 ‘AI가 외국 적대 세력의 감시나 도난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국가적 자산이 됐다’고 보도했다. 나흘 뒤 미 재무부는 내년부터 AI·반도체를 대중 통제 품목으로 묶는 최종 규칙을 발표했다.

AI에 관한 시각은 도널드 트럼프나 카멀라 해리스 후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중국에 AI가 밀리면 군사·안보에서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는 게 공통된 인식이다. AI는 스스로 학습해 진화하는 만큼 강력한 컴퓨팅 능력과 좋은 품질의 빅데이터가 생명이다. 미국으로선 영어로 된 압도적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AI용 반도체만 통제하면 패권 유지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은 “반도체의 자유무역 시대는 끝났다”며 “가장 엄중한 도전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경고했다. 그동안 거대 범용 AI는 유대계가 장악하고, AI용 반도체는 엔비디아·TSMC·AMD 등 대만 카르텔이 지배했다. 그의 위기감은 이런 생태계를 뒤흔드는 미국발 지각 변동을 감지한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설계-한국·대만의 생산-중국의 소비’라는 반도체 공급망은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트럼프 후보는 연일 “TSMC가 우리 반도체 산업의 95%를 훔쳐갔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이 시대의 거인인 TSMC 창업자가 “진짜 싸움이 다가온다”고 예언한 이상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묵시록은 ‘반도체 겨울이 온다’는 식의 업황 사이클 차원이 아니다. 시대적 변곡점이 몰려온다는 경고나 다름없다. 삼성전자 내부 보신주의만 없앤다고 될 일이 아니다. 언제 한국산 반도체를 30% 넘게 소화해준 중국 시장이 막히고, 제2의 미·일 반도체협정이 한국·대만의 목줄을 죌지 모른다. 개별 기업을 넘어 K-반도체, 나아가 한국 경제 전체가 위기다. 위기인데 위기의식이 없는 게 진짜 위기라는 말이 있다.

이철호 논설고문
이철호 논설고문
이철호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