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국방예산이 1000조 원을 넘어 ‘천조국’으로 불리는 미국이 지난해 총탄 한 발, 포탄 한 발 맞지 않고 군 수뇌부 기능이 멈춰 설 위기에 몰렸었다. 세계 최강 미군을 궁지에 몰아넣은 상대는 중국·러시아 같은 외부의 적이 아닌 한 초선 정치인이었다. 토미 투버빌(공화·앨라배마) 상원의원은 낙태를 원하는 군인에게 경비·휴가를 주는 국방부 정책 폐기 요구가 거절당하자 지난해 2월 군·국방부 인사 인준 전면 보류를 선언했다. 미 상원은 국가안보 관련 인사는 일괄처리가 관행이지만, 의원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개별 심사한다. 의원 한 명의 어깃장에 인준 절차가 멈추면서 미군 서열 1위 합참의장까지 공석 위기에 놓이자 상원은 강제 표결로 가까스로 후임 의장을 인준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나선 비판에도 꿈쩍 않고 군 인사 450여 명 인준을 막아 미군을 마비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는 10개월 만에야 인준 보류를 철회했다. 투버빌 의원 폭주를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공화당 동료 의원, 특히 참전용사 출신 의원들이었다. 댄 설리번·린지 그레이엄·토드 영 의원 등이 앞장서 국가안보를 위해 인준 보류를 해제해 줄 것을 간청했다.
1년 뒤 현재 한국에서는 1988년 설립된 헌법재판소가 멈춰 설 위기에 놓여 있다. 이종석 소장을 비롯해 이영진·김기영 재판관 등 국회 추천 재판관 3명이 17일 퇴임했지만, 국회는 후임자 추천을 나 몰라라 하고 있다. 헌재는 결국 자구책으로 재판관 7명 이상 참석하지 않으면 심리를 열지 못하도록 한 조항을 정지하는 가처분 인용 결정을 내렸다. 고육지책으로 심리는 이어가게 됐지만, 헌재 기능은 마비 상태나 다름없다. 탄핵 심판·위헌법률 심판·헌법소원 인용 같은 결정을 하려면 재판관 6명 이상 찬성해야 한다. 산술적으로는 남은 재판관 만장일치로 결정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정당성 논란 등을 고려해 판단을 미룰 수밖에 없다.
7월 말 기준 누적사건이 1271건에 달하는 등 한국 사회 정치적·법적 갈등이 모두 헌재로 몰리지만, 정상화는 아직 기약 없다. 국회 몫 재판관 3명 추천을 두고 여야가 첨예하게 맞선 탓이다. 특히, 과반 의석을 가진 더불어민주당은 여야 교섭단체 각 1명, 여야 합의 1명이라는 관행을 깨고 2명 추천권을 고집한다. 여야 각 1명씩 우선 추천하자는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 제안도 일축했다. 사법부 안팎에서는 민주당이 방송통신위원회 기능정지 장기화, 이 소장 연임 저지 등을 노려 헌재 기능을 마비시키려 한다는 의심이 적지 않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헌재 위기에 눈감은 여야 법조인 출신 의원들이다. 제22대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중 법조인 출신은 민주당 37명 등 모두 61명(20.3%)으로 전문직군 중 단연 최다다. 하지만 그들이 헌재 위기를 하루빨리 끝내고자 당 지도부나 동료 의원을 설득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방어나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를 겨냥한 상설특검·특검 요구 등에 앞다퉈 나서는 것과 대조된다. 법조인 출신마저 국회의 반복되는 법 위반에 눈감고 헌법 수호 최후 보루인 헌재 위기에 무심하다면 다음 총선에서 의원 5명 중 1명을 법기술자로 채울 필요는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