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룸 넥스트 도어’에서 말기 암 환자인 마사(틸다 스윈턴)는 친구 잉그리드(줄리앤 무어)에게 죽음을 앞두고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죽음의 그림자는 없다. 오히려 생의 열정으로 충만하다. 다만 잉그리드는 매일 아침 마사의 방문이 닫혀 있는지 살핀다. 문이 닫혀 있다는 건 곧 마사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반가게 풍월당에서 최근 ‘파도라는 거짓말’이란 시집을 냈다. 음악을 중심으로 인문학 저서도 출판했던 풍월당의 첫 시집이다.

시집을 낸 문원민 씨는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조선해양공학을 전공하고, 세계 5대 선급 회사인 미국선급협회(ABS)에서 20년간 기술자로 일했다. 그리고 그는 시집을 냈던 6월 당시 췌장암 4기로 3개월 시한부 환자였다. 생의 마지막, 문 씨는 일상에서 켜켜이 쌓였던 시상을 토해냈고, ‘파도라는 거짓말’에 담긴 64개의 시는 그 결과물이다.

죽음을 앞둔 시인의 시라기엔 오히려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지점이 많다. 컴퓨터단층촬영(CT)을 이름만 바꿔 ‘천택이네 사진관’에 사진 찍으러 간다고 표현한 게 대표적이다. 시인은 어릴 적 어머니를 떠올리고, 남겨질 아내와 자식들에게 애정의 흔적을 남긴다. 물론 병마와 싸우는 환자의 심정도 묻어난다. 그는 ‘파도라는 거짓말’이란 시에서 ‘묻힐 곳을 찾아 쉬지 않고 달려온 파도는 / 죽을 때가 되어서야 멈춰 설 수 없는 파도가 됩니다’라며 죽음을 앞둔 지금 시라는 거대한 생의 의지가 생겼음을 고백한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는 “대단한 문학서를 만들려고 하는 것도, 시인의 스토리로 상업적 성공을 노리는 것도 아니다”라며 “시를 향한 그의 뜨거운 열정과 폭발적인 생산력이 엄숙함으로 우리를 휘어잡았다”고 말했다. 시집은 대단한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2쇄를 찍으며 독자들의 마음을 잔잔히 울리고 있다.

출판한 지 4개월이 지난 지금 이 시집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고맙게도 문 씨는 여전히 우리와 같은 생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그는 자신의 일상을 SNS에 기록 중이다. 아프다는 절규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어려 아비의 부재를 인식하지 못할 딸에게 쓰는 편지, 뒤늦게 알게 된 클래식 음악에의 열정으로 가득하다. 나는 죽음을 앞둔 그의 곁에서 생의 의지를 본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소식을 반기며 안도한다.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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