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재벌개혁 서사 여전히 건재 수십년 전 시각으로 기업 매도 10년 새 순환출자 483→12개
내부통제·공시의무 유일 국가 밸류업과 상법 개정안도 문제 과도한 주주 환원은 투자 저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한국은 일본의 시장 개혁을 카피하는 데 한계가 있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일본을 본떠 한국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증시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하지만, 상호출자 등 복잡한 지배구조를 이용해 지배력을 행사해온 재벌 위주의 증시 구조 탓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시각은 수십 년 전 자성에서 생겨난 ‘재벌개혁’ 서사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한때 대기업집단은 한정된 자원으로 신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문어발식 확장을 하고, 반도체 회로 같은 상호출자 구조를 활용해 지배력을 높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2014년만 해도 주요 기업집단의 순환출자 고리 수는 483개에 달했지만, 현재는 12개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처럼 대기업집단을 상호출자 제한 기업집단으로 규정하고 고강도 내부 통제와 엄격한 공시 의무를 요구하는 나라도 드물다.
문제는 30∼40년 전의 시각으로 대기업집단을 바라보는 경향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해당 서사로 재미를 보는 세력이 건재한 탓이다. 반기업 정서에 기대어 지배구조 규제를 쏟아 내며 표 장사를 하는 정치권과 저평가된 한국 증시의 원인을 지배구조 탓으로 돌려온 경제 관료들, 경영권 분쟁을 부추기는 약탈적 행동주의자들이 그런 경우다. 실제로 제22대 국회 개원 이후 발의된 지배구조 규제 강화 법안은 21건에 달한다. 이 중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 이익에서 회사와 전체 주주의 공평 이익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불이익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주주들이 소송을 남발할 경우, 기업들은 미래 투자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다.
반도체와 2차전지가 그랬다. 삼성은 1983년 반도체 시장 진출 선언 이후 4년간 1400억 원의 누적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현재 가치로 보면 천문학적인 손해다. 당시 주주들이 적자 발생을 문제 삼아 소송을 남발했다면 과연 K-반도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2차전지도 마찬가지다. LG는 1990년대 초반 2차전지 사업에 뛰어들어 10여 년 동안 성과가 나지 않고 손실만 쌓이자 회사 안팎에선 사업을 접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당시 구본무 회장의 뚝심이 없었다면 LG에너지솔루션도 없었을 것이다.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 성적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올 1∼9월 증시 성장률을 보면 한국만 -3.2%로 뒷걸음질했다. 미국은 20.8%, 인도는 18.8%, 일본은 13.3%를 기록했다. 아무리 자사주를 소각하고 배당을 확대해도, 경영 실적이 부진하고 혁신이 이뤄지지 않아 성장 전망이 어두우면 백약이 무효임을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은 전투에서 귀환에 성공한 비행기를 대상으로 어느 부위에 총알이 많이 맞았는지를 연구했다. 해당 부분에 강판을 덧붙여 귀환율을 높일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통계학자 아브라함 월드가 총탄을 맞지 않은 부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결론은 뒤집혔다. 추락한 전투기는 다른 부위에 총탄을 맞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이유였다. 통계학에서는 이를 ‘표본 편향’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철 지난 재벌개혁 서사에 기댄 밸류업 프로그램은 진단부터 틀렸다. 표본 편향 오류를 범하고 있다.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성장과 내재가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미래 투자 재원까지 끌어다 주주 환원에 올인하면 결국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꼬리가 오히려 몸통을 흔드는 결과를 낳는다.
문화일보는 창간 33주년을 맞아 매출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현 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A 학점을 매긴 응답자는 3.1%에 불과했다. 내년 경제 전망에 대해서는 64.6%가 나빠질 것이라고 답했다. 지배구조 규제 법안이 현실화할 경우 해외 경쟁력과 적극적인 경영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응답은 59%에 달했다.
경제인들은 현 정부와 지난 정부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난 정부는 아예 기업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현 정부는 듣는 시늉만 한다. 현 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초심으로 돌아가 마지막 보루인 ‘규제개혁’에 매진해야 한다. 국회가 앞을 가로막으면 시행령을 뜯어고쳐서라도 과감하게 밀고 나가야 경제라도 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