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창간 33주년 특집
‘윤 정부 개혁 이렇게’ 전문가 인터뷰 - <3> 전주성 이화여대 명예교수
한국재정학회장을 역임한 국내 재정 분야의 권위자인 전주성(67)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윤석열 정부의 연금·의료·교육·노동 등 4대 개혁에 저출생 위기 극복을 더한 ‘4+1 개혁’에 대해 “지금은 개혁의 청사진과 여론의 지지도 없어서 정권 차원의 개혁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 교수는 문화일보 창간 33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개혁이 통상 실패하는 이유에 대해 “‘청사진-공론화-정치적 타협’이라는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자기 임기 내에 성과를 내려 서두르기 때문”이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전 교수는 정권 차원의 일방적 추진보다는 “이제 개혁은 협치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개혁 동력이 상실된 상황인 만큼 교육, 노동 등 주요 개혁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뒤 현 정권에서 정파를 초월한 청사진을 만들고 다음 정권은 정치적 부담 없이 실천만 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여당이 소수당인 상황에서 현 정권이 실질적인 개혁 성과를 내기 위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또 전 교수는 교착 상태에 빠진 의료개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기존 협상 당사자들을 모두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는 “새로운 인물과 함께 여야 당 대표가 주도적으로 나서고 대통령실도 이들을 믿고 맡겨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올해 1월 발간한 저서 ‘개혁의 정석’에서 △청사진 △공론화 △정치적 타협이라는 3대 개혁 성공조건과 함께 기존 정치권의 고정관념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을 주장해왔었다. 전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22일 대면과 3일 전화를 통해 진행됐다.
■ 개혁 늦어지는 이유
구체적 목표·공론화 과정 미흡
실행재원 확보·설득 전략 부족
임기내 성과내려는 욕심 버려야
― 윤 정부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선 구체적 목표와 수단을 담은 청사진, 공론화를 통한 우호 여론의 확보, 그리고 법안 통과를 위한 정치적 타협이 필요하다. 기득권 저항을 분산시킬 전략과 구조개혁을 추진할 재원도 중요하다. 그런데 현 정부에선 교육과 노동은 핵심 과제인 사교육과 이중구조 타파를 위한 청사진조차 없는 상태이고, 연금개혁은 사실상 증세인 보험료율 인상을 설득시킬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올해 갑자기 등장한 의료개혁의 경우 의료 체계의 구조적 비효율 해소보다는 의대 정원 총량이라는 단순 논리로 접근하다가 여론 지지도 얻지 못하면서 의료계의 강한 저항에 부딪힌 상황이다.”
― 전문가들이 ‘정부 출범 1∼2년 이내에 개혁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문했고 실제 윤 대통령도 취임 직후 4대 개혁 추진 방침을 밝혔다. 정부의 ‘개혁 타이밍’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구조개혁은 중장기적 관점에서 사회적 편익과 비용을 따져야 하기 때문에 ‘골든 타임’이 따로 없다. 아무리 정권 초기에 인기가 높더라도 장기 비전과 과도기적 전략을 포괄하는 체계적 청사진이 없다면 개혁 시동을 걸기 어렵다. 개혁이 실패하는 이유는 ‘청사진-공론화-정치적 타협’이라는 일의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자기 임기 내에 뭔가 성과를 내려 서둘기 때문이다. 이 정부도 마찬가지다.”
― 오늘날 한국이 처한 정치·경제·사회 환경은 개혁에 적합한가.
“지난 수십 년 경제·사회 환경은 크게 바뀌었지만 낡은 제도는 그대로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 적극적 정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시대 조류가 바뀌고 있다. 누가 정권을 잡건 구조개혁은 불가피하고 시급한 일이다. 다만 위기 때와 달리 평시에는 개혁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다. 지금처럼 세수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정책 자원을 동원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정책 시계가 넓고, 유능한 능력을 가진 정부만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 현 정부의 공론화 작업은 어떻게 평가하나.
“개혁 과제가 공론화돼 우호 여론을 확보하려면 개혁 비전과 목표, 실천 전략이 설득력 있게 적시된 청사진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추진되고 있는 것들을 보면 기존 정책의 연장 선상에서 부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개혁이라 말은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전문가나 국민을 설득할 준비가 부족하다.”
― 역대 대통령들도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한 적은 흔치 않았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정책 정당의 역사가 길면 청사진이 대체로 마련돼 있다.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청사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개혁은 청사진 없이 시작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 역대 정부들은 취임 직후 ‘전임 정권 지우기’에 나서곤 했다. 임기 5년에 불과한 단임제 대통령이 긴 호흡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 아닌가.
“개혁은 당장은 고통이 따르더라도 몇 세대에 걸쳐 혜택이 나타나는 과정이다. 단순한 제도 변화가 아니라 저항의 극복을 위한 정책 자원과 정치적 지지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5년 임기 내에 완성하기 힘든 경우가 적지 않고, 정파 간 협력이 필수적이다. 임기 후반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정권을 이어가는 개혁’의 시동을 걸 수 있다. 예컨대 교육개혁의 경우 현 정권에서는 정파를 초월한 청사진을 만들고, 다음 정권은 정치적 부담 없이 실천만 하는 ‘모라토리엄’ 방식을 제안한다. 역설적이지만 개혁은 의회 소수당인 윤 정부가 협치를 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교육, 연금, 저출생 문제가 그런 소재가 될 것이다.”
■ 現정부 계획·차기정부 실행
여야합의로 인적자원 모아 협치
편 가르기 대신 저항 분산시켜
다음 정권서 이어갈 개혁 필요
―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개혁 동력도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지금은 청사진도 없는 데다 여론의 지지도 없어서 정권 차원의 개혁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이제는 협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음 정권을 누가 잡아도 교육개혁을 홀로 할 수 없다. 인구 문제도 어차피 장기적인 문제다. 여야 합의에 따라 좋은 인적 자원들을 모으면 협치로 풀 수 있는 문제다. 현시점에서 협치는 오히려 윤 대통령에게 자신의 업적을 남길 기회가 될 수 있다.”
― 현 정부는 ‘사교육 카르텔’이나 ‘노조 쇠구슬 테러’ 사태처럼 특정 집단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개혁 동력으로 활용한 측면이 있다.
“좋은 지적이다. 우선 선거와 개혁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야 한다. 선거는 자기 콘크리트 지지층에서 출발해서 중도로 향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영입해 ‘복지 확대’와 ‘재벌 개혁’을 내세워 성공했다. 그러나 개혁은 그렇게 하면 망한다. 개혁은 중도층을 확보해야 성공한다. ‘편 가르기’를 하면 자기 지지층을 공고히 해 선거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도층 입장에서 보면 포용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 쉽다. 중도층을 잡아야 하는 개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정부는 개혁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이 따르고, 그 저항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금 정부는 개혁을 자꾸만 선악 개념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개혁은 중도 여론을 확대하지 않고선 거의 불가능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기 지지층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이라크 파병 등을 추진했다. 제가 말씀드린 ‘중도’의 편에 서서 자기 생각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개혁에는 청사진도 중요하지만 저항을 분산시키는 일도 굉장히 중요하다. 의료개혁처럼 ‘2000명 증원’ 총량을 먼저 들이밀면 저항은 커질 수밖에 없다.”
― 정부의 ‘주 52시간제’ 정책은 흐지부지된 상태다.
“노동은 워낙 이념적으로 양극화된 분야다. 전문가들조차 양쪽으로 갈리기 때문에 굉장히 다루기 어려운 문제다. 따라서 노동은 최대한 현안을 세분화해서 합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거창하게 흔들어 놓으면 양쪽 싸움만 부추길 뿐이다. 주 52시간제도 사실 합리적인 제안이었는데 그런 세밀한 접근이 부족했다.”
― 여소야대 국회 지형, 여야의 극한 대립 상황을 고려하면 개혁법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가 매우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개혁 과제는 계층·세대·집단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의회 다수당이라도 역풍을 우려해야 한다. 반면 소수당이라도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으면 정치적 타협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현 정부의 개혁은 청사진이나 공론화 자체가 미흡한 상황이라 법안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일반 정책과 달리 개혁은 중도층 여론 확보가 핵심이다.”
■ 향후 개혁 방향 어떻게
연금개혁, 사후 보조금 지원 등
실질적 저항 줄이는 방식 접근
의료협상은 주체들 바꿔 재논의
정책+예산 ‘저출생 컨타’ 신설
― 정부의 연금개혁안은 어떻게 평가하나.
“연금개혁의 핵심인 보험료 인상은 사실상 증세인데, 저항을 줄이려면 반대급부가 있어야 하고 타 집단과의 형평성도 따져야 한다. ‘더 내고 덜 받기’ 방식은 애초에 정치적 허들을 넘기 어렵다. 이번 정부 안이 제가 강조해 왔던 세대 간 형평성 문제를 다룬 것은 진일보한 측면이다. 다만 핵심적인 사안 하나에 집중하지 않고, 자동안정장치 등 다양한 요소가 들어가는 바람에 전선이 넓어진 점이 아쉽다. 보험료의 세대 간 차등화도 이를 명시적으로 내세워 세대 갈등을 촉발하기보다는 사후적인 보조금을 통해 실질적인 저항을 줄이는 방식이 우월하다고 본다.”
― 개혁을 위해선 재원이 필요한데 오히려 현 정부 세수는 줄어들었다.
“지금은 복지, 환경, 의료, 전략산업 등 적극적 정부 역할이 필요한 ‘큰 정부’ 시대다. 무리한 감세 정책을 추진하다 최단명 총리로 물러난 영국의 리즈 트러스 사례에서 보듯 보수 이념에 집착해 시대 조류에 어긋나는 정책을 펴면 낭패를 볼 수 있다. 다른 선진국에 비해 법인세수 비중이 큰 한국의 경우 세수 비용이 큰 세율 인하보다는 전략산업에 집중하는 투자 유인이 더 유효한 수단이다. 최근 세수 부족은 경기 부진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비효율과 불공평으로 얼룩진 낡은 조세제도 때문이다. 재원이 있어야 개혁 과제도 수월하게 갈 수 있다. 기존 제도의 비효율을 줄이면서 조세 저항이 적은 다양한 세원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
―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교육, 주거, 일자리 등 출산·육아 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출생률의 대반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육아휴직 등 출생에 직접 관련된 제도 변화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조적 대책들이 방향성을 잡으려면 사회 문화가 바뀌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뭔가 획기적인 정책 1∼2개로 출산 모멘텀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지방자치단체나 관련 부처에 퍼져 있는 백화점식 유인체계는 예산 효율이 높지 않기 때문에 정책과 예산을 함께 다룰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 정치권에선 외국 인력에 문호를 확 넓히는 방안도 거론된다.
“저출생 대책의 하나로 이민을 말하지만, 우리가 하루아침에 캐나다와 같은 다문화 사회로 전환하기 어렵다.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생산 인력의 충원을 위해 외국 인력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당장 부족한 노동력은 여성이나 은퇴 세대 인력을 활용할 수 있다.”
―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의료개혁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의료개혁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저항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목표와 우선순위가 선명한 청사진을 통해 우호 여론을 확보하고, 의료계를 설득해 저항을 분산시킬 유인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의료개혁의 핵심은 단순한 의사 수 총량이 아니라 필수 및 지역 의료 추락 같은 자원 배분 문제이다. 일차적으로 의료 수가 조정 등을 통해 의료 체계의 구조 개혁에 시동을 건 다음 단계적으로 의대 정원 문제로 이어갔어야 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치밀한 청사진 없이 저항이 가장 큰 방식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덕에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 어떻게 실마리를 찾아야 하나.
“지금 같은 ‘치킨 게임’ 양상에서는 기존의 협상 당사자들부터 교체할 필요가 있다. 해당 당국자도 바꾸고, 의료계도 비대위를 꾸려 새로운 인물들이 나서야 한다. 이들과 함께 여야 당 대표가 주도적으로 나서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지금의 모습은 무책임하다. 이제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같이 나서야 할 때다. 대통령실도 그런 여야 당 대표들을 믿고 밀어줘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합의가 되면 결국 대통령의 업적이 되고 이 정부에도 좋은 일이다.”
△1957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미국 전미경제연구소(NBER)·국제통화기금(IMF)·조세재단·캘리포니아대 방문 교수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재정학회장 △국민경제자문위원 △발전패러다임연구소 대표 △저서 ‘재정전쟁’ ‘개혁의 정석’
김윤희·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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