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4리 경로당 앞에서 칠곡할매래퍼그룹 ‘수니와 칠공주’ 멤버 추유을·홍순연·박점순·이필선·장옥금·김태희·이옥자(왼쪽부터) 할머니가 랩을 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문호남 기자
지난달 29일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4리 경로당 앞에서 칠곡할매래퍼그룹 ‘수니와 칠공주’ 멤버 추유을·홍순연·박점순·이필선·장옥금·김태희·이옥자(왼쪽부터) 할머니가 랩을 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문호남 기자


■ M 인터뷰 - 평균나이 83세… 칠곡할매래퍼그룹 ‘수니와 칠공주’

“뉴욕서 ‘K-할매’ 공연하고파”
어린시절 배움의恨 담은 곡 등
총 10곡 내고 공연도 30여 회

“랩 배우고 세상이 달리 보여”
우린 가사 외우면서 치매 예방
쑤시던 허리도 랩하면 안 아파

“5~6년만 더 같이 활동하지…”
암으로 세상떠난 서무석 할머니
연습할 때도 계속 생각나 쓸쓸


칠곡=박천학 기자 kobbla@munhwa.com

“한글 배워 시 쓰고 책도 냈다네. 주소 명함 노래 가사 읽을 수 있네. 은행 가서 내 사인도 내가 했다네. ∼버스도 탈 수 있어. 아하하.”(한글 배워 시 쓰고)

“황학골에 셋째딸로 태어나쓰. 오빠들은 모두 공부시켰쓰. 딸이라고 나는 학교 구경 못했쓰. 에이∼ 우라질 우라질 우라질.”(황학골 셋째딸)

지난달 29일 오후 2시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4리 경로당. 2023년 8월 전국 처음 결성된 할매래퍼그룹 ‘수니와 칠공주’가 맹연습 중이었다. 젊은 래퍼들처럼 힙한 모자와 옷, 장신구를 걸친 할머니들의 끼 넘치는 랩은 고령화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듯했다. 리더 박점순(86), 왕언니 추유을(91), 분위기 메이커 이필선(88), 베스트 드레서 홍순연(81), 브레인 이옥자(80), 미모 담당 김태희(80), 막내이자 댄스 담당 장옥금(77) 할머니 등 저마다 별명과 역할을 지닌 7명이다. 여기에 지난달 15일 숨진 서무석 할머니까지 포함하면 총 8명이다. 서 할머니는 암(림프종 혈액암 3기) 투병 사실을 멤버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멤버 7명의 평균 나이는 83세. 최고령 91세, 최연소 77세로 세계 최고령 래퍼들이다. 그룹 이름은 리더인 박 할머니의 이름 중 ‘순’을 표현한 ‘수니’와 7명의 멤버를 의미한다.

이들은 한글을 배우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으나, 뒤늦게 한글을 깨치고 아이돌 못지않은 랩 실력을 뽐내며 고령화 시대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국내를 넘어 해외 주요 언론에 소개되며 ‘K-할매’라는 신조어가 붙었다. 이들은 “한글을 익히고 랩까지 하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며 “인생의 황금기를 맞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리더 박 할머니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어떤 계기로 랩을 접하게 됐는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나를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우리 나이대 살았던 분들은 알다시피, 당시 남자는 사람이고 여자는 사람이 아닌 취급을 받았지 않았나. 그래서 평생 글을 모르고 살았다. 우리 멤버 대부분 그런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 이름을 쓰고 은행에도 혼자 가고 싶어서 8년 전쯤 칠곡군에서 운영하는 한글문해교실을 다니며 한글을 배웠다. 이곳을 다니던 중 정우정(52) 칠곡군 성인문해강사가 유튜브를 보여주며 ‘랩’이라고 했다. 처음엔 노래인지 몰랐다. 호기심에 자꾸 따라 하다 보니 흥이 났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랩 도전에 나섰다. 몸이 말을 안 듣고 틀리기 일쑤지만 유쾌하다.”

―그동안 몇 곡을 발표하셨는지.

“총 10곡이다. ‘환장하지’ ‘학교 종이 댕댕댕’ ‘에브리바지 해피’ ‘황학골 셋째딸’ ‘한글 배워 시 쓰고’ 등 배우지 못한 한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다. 모든 랩은 우리가 시를 쓰면 한글 강사이자 그룹 기획자 겸 매니저로도 활동하는 정 선생이 다듬어 곡을 붙였다. 최근 신곡 ‘나는 지금 학생이야’도 발표했다. 내년엔 멤버 각자가 가족을 그리워하는 내용과 살면서 겪은 애환 등을 담은 랩을 발표할 예정이다. 6·25전쟁 당시 총소리를 폭죽 소리로 오해한 ‘딱꽁 딱꽁’과 북한군을 만난 느낌을 표현한 ‘빨갱이’ 등 전쟁의 아픔을 쓴 시도 있는데 랩으로 만들 계획이다.”

―데뷔곡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김태희 할머니가 경북문예대잔치에서 시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나의 꿈’을 랩으로 바꾼 ‘환장하지’다. 가난과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픔을 담았다. ‘나는 지금 학생이야’ 역시 늦깎이 학생으로 한글을 배우는 기쁨과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황학골 셋째딸’도 오빠들 모두 공부하는데 딸이라고 학교 구경도 못 한 슬픔을 노래했다. 랩을 하면서 살아온 고달픈 삶도 떠올리곤 해 먹먹할 때도 있다.”

―그동안 몇 차례 공연했고 인상 깊었던 공연은 어떤 것인지.

“대략 30차례 공연했다. 공연보다 지난해 대기업 광고 촬영을 위해 경기 파주까지 간 것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차로 약 4시간 30분 이동해 하룻밤을 지냈다. 평생 동네에서 농사만 짓다가 북한 땅에서 가까운 곳까지 가서 촬영했는데 고생도 많이 했다. 가장 최근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2024 한글주간 개막식’에서 공연했다. 국가보훈부와 국무총리실 정책 홍보를 위한 캠페인 영상에도 출연했다. 올해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대구지방보훈청이 만든 뮤직비디오에는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어린 학도병의 안타까운 희생을 기리며 직접 가사를 쓰고 출연했다. 학도병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또 폴란드에서 전 세계 고령화 시대에 따른 고립감 해소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만든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하는 등 다양하다.”

인터뷰는 멤버들의 연습 도중 쉬는 시간에도 이어졌다.

―동작이 젊은 층 못지않을 정도로 절도 있고 발성도 크다.

“공식적으로는 매주 화·목요일 경로당에 모여 2∼3시간 연습한다. 공연이 있을 땐 늦은 밤까지 한다. 우리끼리 춤 동작과 노래를 봐주고 맞춰야 해 연습 때는 멤버 전부 모인다. 모두 나이가 많아서 가사를 외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 때문에 강사 선생님이 애를 먹는다.”

―래퍼 활동에 가족 반응은 어떤지.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적적할 때 랩을 흥얼거리면 마음이 안정돼 자식들이 활동을 원한다. 무엇보다 자식들과 사이가 돈독해졌다. 명절 등 연휴 기간 손주들이 오면 랩 배틀도 한다. 당연히 우리가 이긴다.”

―응원하는 팬클럽도 있다고 들었다.

“각계각층 주민과 김재욱 칠곡군수, 가족 등 150여 명이 팬클럽 회원이다. 이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된다. 최근엔 충남 금산군 주민 30여 명이 연습 모습을 보고 응원도 하기 위해 버스를 이용해 경로당에 왔다. 전국 각 지역에서 수시로 응원하러 찾아온다. 공연하러 가면 주차장에서부터 알아보고 환호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도) 유명인 다됐다. 하하.”

―할머니 위주의 래퍼로 구성돼 그룹 운영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연습은 경로당 회의실에서 한다. 모자, 옷, 장신구, 신발은 지역 주민과 기업 등에서 후원한다. 사업하는 분도 있고 봉사단체도 있다. 가족도 든든한 지원자다. 이들로부터 십시일반 도움을 받으면서 활동하고 있다.”

―창단 당시 주변에선 고령이어서 그룹 활동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벌써 1년이 넘었다.

“남들은 운동하는데 우리는 래퍼 활동을 하면서 건강을 다진다. 그냥 있으면 팔, 다리, 허리 등 곳곳이 쑤시는데 랩을 할 때면 아픈 줄 모른다. 가사 암기는 치매 예방에도 좋다. 경로당에서 동고동락하며 연습해 다툰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멤버들끼리 우애가 매우 좋다. 하여튼 래퍼로 활동하는 게 건강 유지 비결이고 정말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와 비슷한 연세의 할머니들에게 래퍼 활동을 추천한다.”

―그룹 멤버 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평생 함께했으면 좋으셨을 텐데.

“그분이 투병 중인 사실을 우리는 전혀 몰랐다. 병원에 입원하고 난 뒤 알았다. 5∼6년만 더 사시면서 우리와 같이 랩 활동을 했으면….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해 잠을 못 잔다. 노래와 춤을 추다가도 생각 나서 잊히지 않는다.”

―창단 멤버는 8명이다. 새 멤버를 영입하시는지.

“경로당에 나오는 할머니는 대략 16명이다. 이웃 마을 할머니들도 있다. 이 가운데 래퍼 활동을 하려는 분들이 있다. 아직 경황이 없어서 당분간은 우리끼리 활동할 계획이다.”

―‘K-할매’로 불린다. 해외에서 공연하면 큰 인기를 얻을 것 같다. 앞으로 계획은.

“아이돌그룹처럼 K-할매의 위상을 떨치고 한류 열풍도 일으키기 위해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공연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노인들의 래퍼 활동이 하나의 실버문화로 자리 잡도록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오겠나. 하하.”



7080에 한글·랩 교실… 수강생 손글씨 ‘할매글꼴’ 문화유산 되기도

■ 칠곡늘배움학교는…

2006년 문 연뒤 2400여명 참여
총 6개 할매래퍼그룹 결성·활동


경북 칠곡군 할매래퍼그룹 ‘수니와 칠공주’ 맴버들은 비문해자였다. 이들은 뒤늦게 칠곡군이 운영하는 성인문해교실에서 한글을 익히고, 시를 쓰며 랩까지 접했다.

칠곡군은 2006년부터 농촌 마을을 대상으로 성인문해교실 ‘칠곡늘배움학교’를 운영 중이다. 지난 9월 말까지 약 260개 마을에서 2400여 명이 참여했다. 모두 고령층으로 운영 첫해 40명에서 2015년 160명, 올해는 지난달 기준 240명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글을 익히는 노인층이 늘고, ‘수니와 칠공주’가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칠곡군에는 △보람할매연극단 △우리는 청춘이다 △어깨동무 △텃밭 왕언니 △밥심으로 랩때린다 등 5개의 할매래퍼그룹이 추가로 결성됐다. ‘텃밭 왕언니’는 지난 2일 칠곡군 왜관읍 1.5번 도로에서 ‘수니와 칠공주’와 랩 배틀대회를 했다.

칠곡군은 도시재생뉴딜사업으로 지난해 11월부터 전문 래퍼를 섭외해 할머니들이 랩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노인 취약계층 무료 급식소인 ‘칠곡 사랑의 집’도 랩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칠곡늘배움학교에서 한글을 익힌 할머니들은 ‘칠곡할매글꼴’도 만들었다. 수강생 중 개성 있는 글씨체를 보인 할머니 5명이 4개월 동안 A4용지에 연습해 정립한 글씨체다. 칠곡군은 이렇게 나온 1만여 장을 모아 글꼴 제작 업체에 의뢰했고 2020년 12월 칠곡할매글꼴이 탄생했다. 글꼴은 글씨체 원작자 이름을 딴 ‘칠곡할매 권안자체’와 ‘칠곡할매 이원순체’ ‘칠곡할매 추유을체’ ‘칠곡할매 김영분체’ ‘칠곡할매 이종희체’ 등이다. 이들 할머니는 모두 70∼80대다.

칠곡할매글꼴은 한컴오피스는 물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와 파워포인트 등에서 정식 글씨체로 등록됐고, 국립한글박물관은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새해를 맞아 각계 원로와 주요 인사·국가유공자 등에게 보낸 연하장에 칠곡할매글꼴을 사용해 인기를 끌었다.
박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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