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래서 사과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패자 아닌 승자의 언어라고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장 자크 루소, 레프 톨스토이가 남긴 3대 참회록은 고전으로 읽힌다. 최근 사과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학문으로 정립될 수준에 이르렀다. 사과학 선구자인 아론 라자르가 2004년 ‘사과에 대하여(On Apology)’를 출간한 뒤 많은 연구가 이뤄졌는데, 대체로 일치하는 원칙이 있다. 실수는 숨기면 커지고 밝히면 작아진다. 사과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사과받는 사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대중을 향한 공개 사과에는 몇 가지가 추가된다. 변명을 덧붙이지 않는 게 좋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적시해야 한다. 미안·유감 등의 말은 감정 표현일 뿐 사과가 아니다. 보상 방안을 내놓고, 재발 방지를 분명히 약속해야 진정성을 인정받는다.(김호·정재승 저 ‘쿨하게 사과하라’)
윤석열 대통령의 7일 담화와 회견은 이런 원론에 충실한 사과와는 거리가 멀다. 윤 대통령은 여러 차례 본인의 불찰·책임·부족함 등을 거론하며 고개를 숙였고, 초심으로 돌아가 더 노력하고 소통하고, 고칠 부분은 고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정작 핵심 화두였던 김건희 여사 문제만 나오면 격해졌다. 사과는 고사하고 해명·변명도 넘어 반박이었다. “국정 잘하기를 바라는 일들을 국정농단이라고 한다면 국어사전을 다시 정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침소봉대는 기본이고 제 처를 많이 악마화시킨 것은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밤새도록 김 여사가 자신의 휴대전화로 온 메시지에 답했다고 소개했지만, 명태균 파문과 관련해선 “아내 휴대폰을 보자고 할 수 없어 물어봤다”고 했다. 이날 회견과 관련해서도 “(김 여사가) 국정 성과만 얘기하지 말고 사과를 좀 많이 하라고 했다”면서 “이것도 국정 관여고 농단은 아니겠죠”라고 했다.
“365일 24시간 노심초사하면서 국민 삶을 챙기려 했다”는 윤 대통령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관점부터 문제다. 국민 요구는 김 여사의 ‘보이지 않는 역할’에 대한 의구심을 분명하게 없애달라는 것이다. 어느 기자가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바깥에서 시끄러우니까 사과하는 것으로 비친다”면서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구체적으로 밝혀달라고 요구했는데, 사과의 원칙에 충실한 질문이었다. 윤 대통령은 “딱 집어서 잘못한 것 아니냐고 해 주시면 딱 그 팩트에 대해 사과를 드리겠다”고 일종의 역공을 했다. 얼마 전 한동훈 대표에게는 “누가 어떤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비서실장이나 정무수석에게 전달해 달라”고도 했다. 한남동 내실에서 필요한 남편의 관점이다. 대통령은 맞은편의 국민 관점에서 사물을 봐야 한다.
일반인이 아내를 감싸는 것은 미담이지만, 대통령이라면 달라진다. 윤 대통령은 자신이 현재 검사가 아니라 10%대 지지율의 대통령이라는 사실도, 왜 회견했는지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런 질문이 없더라도 국민이 납득할 만한 조치를 선제적으로 해야 할 처지다. 이번 회견은 하지 않은 것보다 낫지만, 별다른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지 않아도 윤 대통령 부부의 사과는 이미 신뢰를 많이 잃었다. 윤 대통령은 “장모가 사기를 당한 적은 있어도 누구한테 10원 한 장 피해를 준 적 없다. 내가 약점 잡힐 게 있었다면 정치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장모는 잔고증명서 위조로 징역 1년이 확정됐다. 김 여사는 대선 과정이던 2021년 12월 당시 허위 경력 논란 등에 대해 사과하면서 “조용히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겠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경우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했다. 최근 폭로되는 ‘오빠’ ‘명 선생께 완전히 의존하는 상황’ 등의 문자 메시지, 마포대교 시찰 사진 등은 불신을 자초했다. 윤 대통령은 명태균 씨와 통화하면서 “공관위에서 들고 왔길래 김영선 해줘라 했는데 당에서 말이 많네”라고 하는 육성까지 공개됐는데도 팩트 자체에 대한 소명 없이 장황하게 뭐가 문제냐고 둘러댔다.
김 여사 문제가 완전히 해소됐다는 믿음을 줄 파격적 조치가 필요하다. 내재적 관점을 외재적 관점으로 옮겨서 숙고하기 바란다. 그러고도 뭘 할지 모른다면 좋은 남편은 틀림없지만, 좋은 대통령 되기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