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현지시간) 워싱턴DC 덜레스 공항 면세점에서 가장 장사가 잘된 건 미국 대선 굿즈(Goods·상품)를 파는 코너였다. 대통령 후보의 얼굴이나 당의 구호를 활용해 정치적 상징물을 만들어 파는 건, 한국에도 낯설지 않은 미국의 대선 문화다. 아직 결과를 모르던 이날은 누가 될지 상상하며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꽤 즐거웠다. 다양한 디자인의 모자, 티셔츠, 텀블러, 컵…. 그중 초콜릿 앞이 가장 붐볐다. 도널드 트럼프 살까, 카멀라 해리스 살까. 각각 두 사람의 얼굴이 들어간, 맛도 크기도 똑같은 밀크 초콜릿 앞에서 사람들은 마치 누굴 뽑을지 고민하는 유권자(실제론 대부분 투표권 없는 한국인들이었지만)의 얼굴이 됐다. 정치적 지지와 굿즈의 매력은 다소 다를 것이다. 그러나 판매금이 각 후보의 후원금이 된다고 하니, 이 구매는 어떤 식으로든 선거에 영향을 끼친다. 초콜릿이지만 ‘그냥’ 초콜릿이 아닌 것이다.
두 후보가 열띤 ‘초콜릿 경합’을 벌이는 중에,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댔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인 태영호 전 국민의힘 의원이 등장해서다. 태 사무처장은 워싱턴DC에서 강연을 하고 귀국하는 길이라고 했다. 그도 초콜릿을 샀다. 노란색 면세점 바구니를 든 모습이 친근하고 흥미로워 유심히 봤는데, 바구니에 트럼프 초콜릿이 가득했다. 그리고 진열대에 남은 것마저 쓸어담고 있었다. 탈북자 출신 여권 인사로 미국의 대북정책 논평도 해온 그이기에, 이 장면이 어딘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예견일까, 바람일까. 아니면 그저 상품으로서 해리스보다 트럼프의 얼굴이 마음에 든 걸까. 참고로 한참 망설이던 기자의 선택은, ‘트럼프 반-해리스 반’.
굿즈 코너에 유독 한국인이 많은 건, 국내선 볼 수 없는 정치 문화라 신기하고, 미국 대선 결과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여서 관심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별걸 다 만들어 파는 자본주의 제국에 혀를 내두르다가도, 선거를 축제와 오락처럼 즐기고, 문화로 소비하는 미국이 조금은 부러웠다. 그러다 문득, ‘굿즈’ 하면 한국인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에 트럼프 포카(포토카드)와 화보가 화제였는데, 거대한 K-팝 굿즈 시장을 떠받치는 핵심도 포카와 화보다. 또, 불교계는 MZ들의 취향을 저격한 굿즈로 인기를 끌고, 박물관에선 전통을 재해석한 기념품(뮷즈)이 불티나게 팔린다. 이러한 저력이 정치와 결합하면 어쩌면 새로운 문화적 풍경이 나오지 않을까. 굿즈 소비에 익숙한 2030이 호소력 있는 ‘정치 굿즈’를 만나면,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한 마음이 조금 움직이지 않을까. 금권선거를 막기 위해 선거제도가 엄격해지면서, 한국에선 정치 굿즈 제작과 배포가 어렵다. 높은 벽을 만나 상상을 멈췄는데, 사실 더 큰 문제는 ‘만들 거리’의 부재라는 자조에 다다랐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사고 싶은’ 캐릭터가 있는가. 모자나 티셔츠로 간직하고 싶은 정치인의 말, 당의 철학이 있는가. 어쩌면 미워하는 정치인을 희화화한 굿즈가 더 잘 통할지 모르겠다. 아니면 저주 인형이라던가….
예견이든 바람이든, 태 사무처장의 선택은 적중했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자, 그의 바구니 속 초콜릿들이 떠올랐다. 그게 어디에 있든, 누가 받았든, 선거 과정이 악다구니가 아닌 놀이와 문화소비가 될 수 있다는 걸 한번은 상상해 보기를. 정치가 문화의 자장 안을 비집고 들어와, 즐거운 풍경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더 많이 알고, 보기를 바라본다. 그게 다음 대선이라면, 너무 이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