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실베이니아주 수더튼의 이매뉴얼 레이디스 교회. 아펜젤러가 다녔던 교회로, 성도 수가 줄고 있는 미국에서 드물게 성장 중이다.
펜실베이니아주 수더튼의 이매뉴얼 레이디스 교회. 아펜젤러가 다녔던 교회로, 성도 수가 줄고 있는 미국에서 드물게 성장 중이다.


■ 개신교 韓선교 140년… 美현장서 선교사들 발자취를 좇다

레이놀즈, 호남 복음화의 父
전주신흥고 세워 교육 이바지

목사이면서 의사였던 오웬
1898년 목포에 와 의료봉사

전킨, 1892년부터 구호활동
세 아들과 풍토병에 세상 떠

정동제일교회 세운 아펜젤러
美고향 교회에 한국인들 발길


미국 장로교역사협회의 자수로 수놓은 한반도 선교 지도.
미국 장로교역사협회의 자수로 수놓은 한반도 선교 지도.


뉴저지·펜실베이니아·버지니아(미국) = 글·사진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한국에 기독교를 확립시킨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95년 4월 손을 잡고 제물포에 발을 디뎠다. 내년이면 140년. 교계는 올해부터 이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를 연열고 있다. 한국 선교의 역사를 돌아보는 건 어떤 의미인가. 신앙인은 이 땅에서 헌신한 이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 초심을 찾을 것이다. 신자가 아니라도 지난 140년은 각별하다. 나라를 빼앗기고, 되찾고, 근대화를 이뤄온 과정이 그 속에 오롯하다. 의료와 교육을 중심으로 한 포교활동이 나라 발전에 마중물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기에. 문화일보는 한국미래재단(이사장 소강석)과 함께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2일까지 6일간 미국의 주요 신학교와 교회 등을 탐방했다. 동쪽의 작은 나라를 향해 품었던 초기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좇았다.

◇전킨·레이놀즈·오웬…세 청춘이 ‘한국’을 품었던 그 교정 = 하늘도 나무도 가을빛에 물들어 가던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유니온장로교신학교. 삼삼오오 짝지은 학생들은 교정을 기운차게 활보하고 있고 이 학교 도서관에선 잠시 숙연한 침묵이 흘렀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한국 취재진들에게 라이언 두셋 사서가 먼저 보여준 것은 바스락거리는 낡은 문서들. 가만 보니 누군가의 신학교 지원서다. 윌리엄 전킨(1865∼1908), 윌리엄 D 레이놀즈(1867∼1951), 클레멘트 오웬(1867∼1909). 미국 남장로회에서 파송해 충청과 호남 등 지방에서 헌신했던 초기 선교사들의 이름이다. 각각 전위렴, 이눌서, 오기원이라는 한국명을 가진 이들은 지역민들과 살을 부대끼며 자신들보다 조금 앞선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포교 활동을 펼쳤다. 탐방을 인솔한 소강석 한국미래재단 이사장(새에덴교회 담임목사)은 “선교 역사도 서울 중심으로 기억되는 건 안타깝다. 지역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준 선교사들을 이제 제대로 호명해야 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 남장로회의 본산 유니온장로교신학대의 한글 성경.
미국 남장로회의 본산 유니온장로교신학대의 한글 성경.


 교계에 따르면, 개신교 관계자들이나 성도들 역시 이동 거리의 문제나 편의상 뉴저지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흔적을 살핀 후 귀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일까. 이 학교 관계자들은 모처럼의 취재진을 보자 반색했고 내내 달떠 보였다. 지원서 말고도 학교 측은 세 사람의 학교생활이나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증명하는 귀한 자료들을 아낌없이 공개했다. 특히 1930년에 발행된 ‘셩경젼셔’가 눈길을 끌었다. 최초로 구약 전체를 번역하는 등 한글 성경 보급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레이놀즈가 남긴 유산이다. 아래 아(·)가 쓰인 ‘하ㄴ·님(하나님)’이 시대상을 읽게 한다. ‘호남 복음화의 아버지’로 불린 레이놀즈는 전주신흥고등학교를 세워 근대식 교육제도의 정착에도 이바지했다. 오웬은 목사면서 의사였다. 목포와 광주에 진료소를 열고 환자를 돌봤는데 이들 중엔 한센인이 많았다. 과로에 시달리면서도 청진기를 놓지 않았던 오웬은 1909년 급성폐렴으로 사망한다.

윌리엄 전킨(오른쪽 두 번째) 선교사 가족사진.
윌리엄 전킨(오른쪽 두 번째) 선교사 가족사진.


 유니온신학교에 따르면, 전킨은 미국 버지니아 크리스천버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892년 한국에 들어와 처음엔 서울에서 전염병 구호활동을 했고 4년 뒤 전북 군산에 가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를 설립한다. 그는 8남매 중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는 시련을 겪었는데 자신도 결국 전주에서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전킨은 자신이 한 일을 희생이라 부르지 말아 달라며 “한국에서 사역할 기회에 감사할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딸 메리에 의해 전해진다.

 세 사람을 포함해 남장로회 파송 7인의 선교사들은 북장로회(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에서 파송해 수도권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에 비해 훨씬 지역민들과 가깝고 풍습에도 잘 적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웬 이후 로버트 윌슨(1880∼1963)과 윌리 포사이드(1873∼1918)가 의료 선교를 이어갔고, 유진 벨(1868∼1925) 선교사 가문도 호남 지역에서 4대까지 헌신했다. 우리가 잘 아는 인요한(존 린튼) 의원이 벨의 외증손이다. 교계에선 한국과 미국이 거리는 멀지만, 남쪽 지방 특유의 온화하고 다정한 기운이 서로 닮아있는 게 아니냐는 농담 섞인 분석도 한다. 전킨이 세운 영명학교 졸업생인 소 목사는 “교육 선교의 뜻을 품은 학교에서 목회자의 꿈을 키웠다”면서 “이들의 희생을 되새기며 한국 교회가 자성하고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다닌 교회… 한국 개신교의 미래와 과제를 엿보다 = “코로나19를 겪으며 성도 수가 급감했고 지금은 40∼50명이 간신히 나옵니다. 언더우드의 발자취를 좇는 한국인들의 열정을 알아요. 반성하고 자극도 받지요.” 지난달 28일 미국 뉴저지주 노스버건에 자리한 그로브개혁교회 담임목사 스티븐 게르모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불모지였던 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미국 교회가, 이제는 한국 교회의 신앙에 탄복하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연세대와 새문안교회를 설립한 언더우드는 이 교회를 다니며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 생전 바람대로 그의 유해는 1999년 양화진으로 이장됐으나 오랫동안 이 교회 묘지에 가족들과 함께 묻혀 있었다.

 언더우드가 다닌 뉴브런즈윅신학교에서도 그는 가장 선교 성과가 큰 인물로 꼽힌다. 그의 이름을 딴 ‘글로벌 기독교 언더우드 센터’도 있다. 센터는 도서관으로도 쓰이는데, 언더우드가 다니던 당시의 책상과 의자 등이 오롯이 남아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29일 방문한 센터에는 언더우드 흉상과 함께 한·미 양국에서 나온 언더우드 관련 서적, 국제 학술회의 자료들이 즐비했다. 센터장을 맡고 있는 김진홍 석좌교수는 언더우드가 선교 중에 미국으로 보낸 편지를 포함해 다양한 자료들을 공개했다. 김 교수는 “그의 편지엔 늘 조선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면서 “특히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크리스천코리아’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이 오히려 미국에 ‘자극’을 준다던 그로브개혁교회 목사의 말과 함께 숫자가 증명한다. 개신교 선교 140년 만에 한국은 세계 최대 선교대국이 됐다. 현재 한국은 174개국에 2만3000명을, 미국은 6만여 명(이상 2023년 기준)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인구 대비로 환산하면 미국보다 한국이 더 많이 파송한다.

 140년 전 파란 눈의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은 의료와 교육 등 한국 근대화의 한 축을 담당했고 그들이 꿈꾼 ‘크리스천코리아’, 즉 선교대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제 미국에도 선한 영향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지난달 30일 방문한 펜실베이니아주 수더튼의 이매뉴얼 레이디스 교회가 그 증거다. 이 교회는 아펜젤러의 고향 교회인데, 한국인 연구자들과 성도들에 의해 2010년대에 그 사실이 밝혀진 독특한 사례다. 당시 목회를 맡고 있던 존 니더하우스 전 담임목사가 이에 흥미를 느껴 교회 인근 마을의 아펜젤러 생가도 찾아냈고,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가장 주목할 것은 이후 교회가 더욱 성장했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 80명 안팎이던 신도가 현재 300명을 넘어섰다. 36년간 사역하고 은퇴한 니더하우스 목사는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행한 것들이 알려지고 교회에 각성과 부흥이 일어났다. 해외 선교에 다시 힘을 내게 됐는데 요즘 미국에서 우리처럼 성도 수가 늘고 있는 교회는 극히 드물다”고 전했다.

소강석(왼쪽) 새에덴교회 목사와 언더우드의 모교 뉴브런즈윅신학대의 마이카 L 매크리어리 총장.
소강석(왼쪽) 새에덴교회 목사와 언더우드의 모교 뉴브런즈윅신학대의 마이카 L 매크리어리 총장.


 아펜젤러의 헌신이 다시 아펜젤러의 고향에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 교회는 한국 성도들의 방문이 잦아지면서 아펜젤러의 흉상과 관련 자료, 한국에서 온 선물 등을 모아 소박한 기념관도 꾸렸다.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세운 아펜젤러는 1902년 군산 앞바다에서 여객선 침몰로 사망했고 아직 그 유해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 교회 옆 공동묘지엔 한글이 들어간 아펜젤러의 묘비가 우뚝 서 있다. 충청도의 한 교회에서 5000달러를 기부해 만들었다고 한다.
박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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