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 속의 This week
19세기에 유럽인 최초로 아프리카 횡단에 성공한 영국의 탐험가이자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 그는 아프리카에서 16년 만에 귀국해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았고, 자신의 탐험기를 책으로 발간해 세상에 알렸다. 그렇게 유명 인사가 된 그는 1866년 아프리카로 다시 떠난 뒤 5년 동안 소식이 끊겨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가 됐다. 1871년 3월, 미국 뉴욕헤럴드의 기자 헨리 모턴 스탠리가 그를 찾아 나섰다. 약 7개월 만인 11월 10일 아프리카 탕가니카 호수 부근 우지지에서 극적으로 그를 만난 스탠리는 첫인사를 건넸다.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죠(Dr. Livingstone, I presume)?”
리빙스턴은 1813년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부터 방직 공장에서 일하며 어렵게 자란 그는 대학에서 의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선교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840년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남아프리카 지역에 파견돼 원주민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생활 방식을 이해하려고 했고, 서서히 신뢰를 쌓아갔다.
당시 아프리카는 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리빙스턴은 대륙을 탐험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아프리카의 문화와 자연을 유럽 사회에 전했다. 거대한 폭포를 발견하고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 ‘빅토리아 폭포’라 이름 지었다. 탐험 도중 노예무역의 처참한 현실을 목격한 그는 노예무역의 잔혹함을 유럽에 알리고 폐지를 위해서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나일강 수원(水源) 탐사에 나섰던 그가 몇 년간 실종됐다는 소식은 대중의 궁금증을 자아냈고, 뉴욕헤럴드신문사는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훗날 탐험가로 변신하는 기자 스탠리를 아프리카로 파견했다. 힘든 여정 끝에 마침내 리빙스턴과 조우했을 때 스탠리가 건넨 인사말은 역사적 만남의 상징으로 세계 탐험사에 길이 남는 유명한 말이 됐다. 두 사람의 만남은 스탠리가 쓴 기사와 책을 통해 전 세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발견 당시 리빙스턴은 매우 쇠약하고 병든 상태였다. 스탠리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한 후 탐험을 이어나갔으나 1873년 5월 오늘날의 잠비아에서 이질로 숨을 거두었다. 28세에 선교를 위해 처음 아프리카에 온 지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현지 주민들은 그의 심장을 꺼내 묻고 주검은 말려서 미라로 만들어 영국으로 보냈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후 안치됐다.
스탠리는 리빙스턴과의 만남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큰 명성을 얻었고, 이후 아프리카 탐험을 계속했다. 특히 콩고강을 탐사하는 등 중요한 지리적 발견으로 아프리카 지도 제작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리빙스턴과 함께 당대 최고의 탐험가였으나 벨기에의 콩고 식민지화를 돕는 역할을 해 제국주의적 탐험이라는 비판적 평가를 함께 받는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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