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워싱턴의 싱크탱크에서 일하는 한 지인은 11·5 미국 대선 전 보내온 이메일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한국이나 유럽으로 망명을 하려는데 받아주겠냐고 얘기하는 미국인 친구가 많다”고 했다. “패망한 남베트남의 보트 피플처럼 미국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민주당 지지자도 꽤 된다고 했다. 트럼프 승리가 굳어진 지난 5일 밤부터 실제 온라인에는 ‘미국 떠나기’ ‘캐나다 이주’ 등에 대한 검색이 폭증했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트럼프의 백악관 복귀 확정 후 미국인들의 캐나다 이주 관련 검색량은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정 단어의 인터넷 검색 흐름을 보여주는 ‘구글 트렌드’에서도 캐나다로 이주하는 방법에 대한 검색은 대선 직후 급증했다. 캐나다 이주와 관련된 검색어는 하루 만에 5000%가 늘었다고 한다. 민주당 지지 ‘블루 스테이트’인 버몬트·오리건·워싱턴주에서의 검색량이 높은 것을 보면, 트럼프 당선에 대한 실망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했을 때도 캐나다 이민 웹사이트가 접속 폭주로 일시 마비된 바 있다. 특히, 미국 경제지 포천은 ‘미국을 떠나고 싶으세요’라는 기획에서 미국인이 이주할 만한 나라를 소개했다. 북미에서는 캐나다가 높은 삶의 질과 친이민 정책으로 우선 꼽혔고, 멕시코도 인접성 차원에서 편리하다고 소개됐다. 유럽에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중남미에서는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아시아에서는 베트남이 꼽혔다.

‘트럼프 발작증후군(TDS·Trump Derangement Syndrome)’ 환자란 표현이 있다. 트럼프가 2019년 당시 트위터에 새해 메시지를 올리면서 자신을 혐오하는 이들을 조롱하듯 ‘TDS 환자’라고 규정한 뒤 “이 질환이 없는 이들에게 올해는 환상적인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탈미(脫美) 희망자가 폭증하는 것은 다시 4년 전처럼 ‘TDS’를 앓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스마트폰 등으로 워싱턴의 모든 뉴스가 실시간으로 전파되는 상황에서 미국을 떠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지만, 일단 그의 임기 4년만이라도 물리적 거리를 두면 치유될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의 결정이라는 점에서 자발적이고 한시적인 ‘정치 망명’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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