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구 前 한국경영학회 회장 “국가산업 지원 전문 관료 육성… 민간전문가와 전략적 네트워킹”
이정현 명지대 경영대 교수 “산업중흥정책 장기 비전 설정… 정권 무관 차질없이 진행돼야”
이영달 뉴욕기업가정신기술원장 겸 교수 “아이폰 1호 구매자는 美국방부… 韓도 ‘혁신 마중물 시장’ 필요”
글로벌 첨단산업이 주요국의 강력한 보호무역 체제 아래 긴밀한 합종연횡을 이어 가는 가운데 한국이 처해 있는 첨단 전략산업의 고립은 개별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의 위기라는 전문가 진단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반도체·자동차 등 각기 다른 산업이 융·복합화하며 진화해나가는 글로벌 흐름에서 한국이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기업과 정부가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미래 혁신 패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문화일보는 지난 14일 서울 중구 새문안로 문화일보 사옥에서 한국경영학회 글로컬(지역 특성을 살린 세계화) 신산업혁신생태계연구팀, 강남훈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 회장 등 학계 및 산업계 전문가들과 고립위기에 놓인 한국 첨단산업의 위기 극복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글로컬 신산업혁신생태계연구팀은 김재구 한국경영학회 전 회장, 이정현·이영달 부회장이 참여했다.
―반도체 산업 위기론이 나온다.
△김재구=1983년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의 도쿄(東京) 선언 이후에 우리나라는 10년여 만에 세계 정상급에 올랐다. 지난 30년 동안은 안정적으로 주도권을 유지해왔지만, 최근 각국이 반도체 산업을 국가 안보 전략으로 접근하면서 공급망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미국은 탈중국 기반의 공급망 완성을 위해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은 일본과 협력하고, 장비는 유럽연합(EU)과 협력한다. 문제는 한국이 소외돼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이라도 개별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국가적인 차원의 위기라고 진단할 수 있다.
△이정현=D램 경쟁력을 지난 30년 동안 가치 사슬 전반으로 넓히지 못한 게 현재 위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미세 공정, 첨단 공정의 규모에만 집중하면서 정교성은 떨어지고, 인공지능(AI) 반도체나 차량용 , 전력용 반도체 등으로 다변화·다양화하지 못했다.
△이영달=제조 메모리라는 하나의 분야에서 세계 1등을 하는 구조가 10여 년 정도 이어져 오다 보니, 전체 반도체 산업에서 우리가 세계 정상급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착시 속에서 시간을 허비했다. 현재 반도체 제조가 미국과 한국, 일본, 대만 등 4개국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보는데 종합적으로 보면 우리가 가장 비교 열위에 있다.
―글로벌 첨단산업 융합 시대다.
△강남훈=미래차 트렌드는 패러다임 전환이다. 기계 산업이 정보기술(IT) 소프트웨어와 결합하고 전장과 합치되면서 스마트화 등 융합 산업으로 바뀌어 나가고 있다. 전통적인 자동차 시장의 경쟁 구도는 미국과 유럽, 일본, 한국 기업 중심으로 재편됐지만, 중국이 전기차로 새롭게 부상하면서 판도가 달라지고 있다.
△이영달=테슬라는 전주기·전범주 통합 모델을 갖추고 있다. 배터리에 반도체 최초 공급망까지 내부화시켰다. 전범주는 개발·생산·판매까지 제3자의 개입 없이 완전히 독자적으로 한다. 이는 자동차 산업뿐만 아니라 첨단산업 전반에 굉장히 중요한 파급력을 불러올 것 같다. 이전에는 산업 영역이 배터리, 반도체, 차량 제조, 소재 등으로 구분됐지만 이제는 융·복합화로 구분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
△김재구=선도 기업들은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생태계)을 적극 활용하며 기술 융합을 주도하고 있다. 테슬라가 가장 선도적이었고, 구글도 굉장히 비슷하다. 구글이 현재 빅테크로 성장해온 중요한 요인은 구글 벤처스 같은 기업 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을 이용해 인수·합병(M&A) 방식을 통해 스타트업을 계속해서 흡수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이영달=정부 역할론을 강조하고 싶다. 미국 빅테크 기업은 정부의 혁신 조달 시스템을 통해 성장했다. 아이폰의 제1호 구매자는 미 국방부다. 화이자, 릴리의 신약과 의료 장비도 최초 구매자가 다 정부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혁신 유효 시장’이라고 하고, 쉬운 표현으로는 ‘혁신의 마중물 시장’이라고 한다. 정부가 기술과 산업의 변화 트렌드를 반 박자 빨리 읽고, 혁신의 마중물 시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강남훈=그게 가장 잘 적용된 게 중국이다. 중국 전기차는 중국 정부가 자금을 투입해 시장을 형성하고 이끌어온 대표적인 모델이다. 미국도 자국 중심 미래 첨단산업의 생태계를 더 공고히 하려 할 거다. 과거에는 대기업에 지원하면 특혜라고 했지만, 미래의 핵심적인 산업의 패권을 누가 쥐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대기업 특혜 프레임으로 볼 사안이 아니다.
△김재구=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전략을 펼 수 있는 전문 관료가 한국의 강점이었다. 흔들리지 않도록 중립성을 가지면서도 국가 전략을 판단할 수 있는 전문 관료를 육성해 시장에 정통한 산업계 민간 전문가, 협회 등과 전략적 네트워킹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노동 개혁이나 교육 개혁을 통해 핵심 인재도 확보돼야 한다.
△이정현=첨단산업 자체가 개별 기업의 설비 투자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정부의 모든 자원을 다 쏟아붓는 방식의 투자여야 하고, 그 투자가 실패하지 않도록 매우 정교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산업 영역의 계획은 정치적인 집권당의 변동과 무관하게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