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도체산업은 1970년대 후발자로 시작해 지금의 세계 최고 지위에 이르렀다. 과학기술 역사가 짧은 대한민국이 미국·일본 등 선발자들을 따라잡기 위해 선배들이 기울였던 밤낮 없는 노력이 무용담처럼 남아 있긴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최강국 지위를 지켜왔기에, 우리의 반도체산업이 태생부터 강했고, 앞으로도 강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현재 반도체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각국 정부가 전폭 지원하는 무한경쟁이 펼쳐지면서, 우리 지위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상황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실질적 위기에 처한 것이다.
반도체산업은 기술집약 산업이다. 누가 연구·개발(R&D)을 빨리해서 생산하느냐가 경쟁력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반도체 기술을 가장 빨리 개발했고, 생산했다. 반도체 종주국인 미국·일본·유럽도 원천 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속도에서는 우리를 넘어설 수 없었기에 대한민국 반도체가 세계 최고가 됐다.
앞으로의 경쟁은 선발 국가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근무시간이 긴 대만, 막대한 정부 지원을 받는 중국 등과의 경쟁이기도 하다.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는 방법은 R&D 속도를 높이는 것뿐이다.
앞으로 기술 개발 속도에서 간발의 차이가 승패를 가르고,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되는 구조가 심해질 것이다. 그런데 반도체 기술 개발은 단시간에 결과가 나오기 어려운, 반복적 시행착오 과정을 거쳐야 하는 고도의 노동 집약적인 과정이다.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 속성상 개발 사이클이나 경쟁 상황에 따라 유연한 근로시간 운용이 필요한데, 무리하게 주 52시간 제도에 맞추려다 보니 기술 경쟁에서 앞서 나가긴커녕,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경쟁력까지 와해되지나 않을지 우려된다.
기술 인력 부족까지 심해지는 가운데, 기존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유연성이 더욱 절실하다는 점도 고려하면 52시간 제도는 반드시 재고해야 한다. 주 52시간 예외를 적용받는 ‘특별 연장근로’ 제도가 있긴 하지만, 승인 절차가 까다롭고 특별한 상황이라는 점을 기업이 입증해야 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다.
대만의 TSMC는 연구 연속성을 위해 R&D 팀을 주 7일, 24시간 3교대로 운영한다. 주요 공급망 업체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기술적 문제가 발생하면 3시간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미국은 일정 이상 고연봉자에 대해 근로시간 관련 규정 적용을 제외하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Collar Exemption) 제도’를 운영 중이다. 일본도 2018년 고도의 전문 지식을 요하는 일정 연봉 이상 근로자는 근로시간 규제 적용에서 제외하는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도입했다. 근로시간 규제에 묶여서는 글로벌 선도 기업이 달리는 속도에 맞추기 힘들다.
이번에 여당에서 발의한 ‘반도체특별법’에는 주 52시간 예외조항이 포함돼 있다. 반도체 전쟁 시대에 우리는 미래를 위해 전향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근로시간 유연화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민감한 주제다. 경쟁국들처럼 제도를 완화하자고 하면 반(反)노동적 발상이란 비난이 쏟아질 수 있다.
이처럼 주 52시간 제도가 어느새 우리 사회의 성역처럼 여겨지지만, 국가 경쟁력 회복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는 현실적 관점이 꼭 필요하다.
기업들이 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 K-반도체 위기 극복 골든타임이 끝나기 전에 정치권과 기업·시민사회·노동계가 함께 진솔한 고민을 나눌 때다. 미래세대를 위해 반도체산업을 온전히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게 우리의 역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