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찬 서리 내리고 첫 얼음 소식도 전해졌다. 곧 겨울이 오리라! 파주 들녘에 까마귀 떼가 내려앉고, 청명한 하늘에는 쇠기러기 떼가 V자 대오를 지어 난다. 거실 대리석 바닥의 찬 기운이 싫어 밤에는 보일러를 돌린다. 밖에 나갈 때는 보온 양말을 신고 찬 기운을 막으려고 목도리를 두른다. 먼 데서 다가오는 겨울의 기척을 감지하며 걷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돌아보니, 어른 손바닥만 한 오동나무 잎이 속절없이 지고 있다. 집 근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아래에도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걸 볼 때 조락과 침잠의 계절이 깊어감을 실감한다.
가을날의 짧음을 아쉬워하며 임진강변의 낙조를 보고 돌아왔다. 가을에는 왜 유독 우울하고 쓸쓸해지는지를 곰곰 생각한다. 내 안에 쌓이는 막연한 불안은 내가 혹한을 두려워하던 혈거 시대 인류의 후손인 까닭이리라. 천지가 얼어붙는 겨우내 자주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겨울은 선조들에게 공포였을 테다. 내 무의식 어딘가에 그 두려움이 선험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낮의 길이는 짧아지고 일조량은 준다. 그럴수록 내 안의 설렘이나 열정이 줄고 그 대신 우울감이 깊어진다.
여름에 집필을 시작한 소설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다고 탄식을 하던 아내는 쓰던 원고를 챙겨 집을 떠났다. 바닷가의 레지던스 시설에서 소설 초고를 마무리하고 돌아온다고 했다. 집에는 나와 고양이 두 마리만 남았다. 고양이 돌봄은 내 몫.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면 배고프다고 따라다니며 보채는 고양이에게 사료를 덜어주고 모래로 덮은 배설물을 치운다. 그리고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 안치고 찬을 만든다. 아침 뉴스를 보며 사과 한 알과 아침밥을 먹는데, 이렇게 때맞춰 밥을 먹은 뒤 그릇을 씻고 말리는 일도 다 수행이라고 여긴다.
한 사람 빠져나갔을 뿐인데 집은 텅 빈 듯하다. 내가 적막한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원고를 퇴고하는 동안 고양이들은 창밖 나무에 앉아 우짖는 곤줄박이나 까치를 바라보며 채터링을 한다. 채터링은 새 따위를 보며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찍찍거리며 새소리를 흉내 내는 특유의 습관이다. 고양이는 잡을 수도 없는 새들을 집요하게 노려보며 안절부절못한다. 고양이가 이렇게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은 새를 사냥하던 야성의 명령에 반응하는 신호일 테다.
우리 생의 반려인 고양이들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집사에게 떠넘기고 저희의 시간에서 노동과 수고를 배제한다. 대신 우리는 고양이의 사료와 모래, 치료비를 벌려고 부지런히 원고를 쓴다. 그 대가로 고양이가 우리에게 베푸는 것은 약간의 애교와 친밀감, 한도가 없는 아름다움뿐이지만, 집사들은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다. 고양이들은 종일 햇볕 잘 드는 창가 소파에서 졸거나 그루밍을 하며 보낸다. 가을이 되자 고양이들의 식탐이 눈에 띄게 달라진다. 게다가 여름보다 더 많이 먹고 오래 잔다. 털도 덜 빠진다. 혹한에 대비해 살을 찌우고 털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고양이는 배를 채우고 잠을 즐길 뿐 곤궁에 대한 근심 따위는 아예 없어 보인다. 인간이 결핍의 존재라면 고양이들은 충만 그 자체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고양이들은 굳이 ‘논어’나 ‘니코마코스 윤리학’ 따위를 읽을 필요가 없다. 평생을 다해 완수할 과업이나 나날이 도달할 성과 목표도 없으니 고양이들은 창밖을 내다보거나 몸통을 동그랗게 말고 달콤한 낮잠을 즐긴다. 나도 일이나 성과에 내몰리지 않은 채 빈둥거리고, 더러는 피곤한 몸을 눕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싶다. 하지만 어쩌나, 근심과 수고는 오로지 인간의 몫이다. 우리에게 긴 짬과 한가로움, 관조하는 삶은 소수만 누릴 수 있는 사치일 뿐이다.
고양이에게 잠은 안식과 행복을 부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동물은 제 안전이 담보되는 상황에서만 잠을 청할 수 있다. 평화롭게 잠든 고양이가 보여주는 것은 저를 식구로 받아들여 보살피는 우리를 향한 두터운 우정, 제 안전이 지속되리란 신념이다. 고양이는 앙리 베르그송이 말한 ‘내적 삶의 지속되는 선율’에 따르는 존재인가? 고양이들의 그 자족과 여유에 감탄한다. 이 작고 사랑스러운 생물에겐 고요와 무위가 타고난 능력일 테다. 아, 늘 수고하고 근심하는 동물의 일원인 내 눈에 비친 고양이들은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가!
하루 치의 글쓰기는 대개 오전에 마친다. 오후엔 홀가분하게 집을 나서서 교하의 갈참나무 숲속 걷기를 좋아한다.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드는 늦가을의 양광이 고운 단풍을 투명하게 꿰뚫는다. 머리 위로 파란 천공을 이고 대지를 발바닥으로 힘차게 디디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찰나는 무용하지만 찬란하다. 이 벼락같은 깨달음은 봄에 핀 것은 가을에 지고, 높이 매달린 것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들로 가득 찬 땅의 소리를 경청하고 내 안에 있는 세계를 향한 우정이 깨어나는 데서 비롯한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거실엔 어둠이 고즈넉하다. 등을 켜면 거실은 환해진다. 고양이의 밥그릇에 저녁 사료를 챙긴다. 고양이들이 얌전하게 사료를 먹는 동안 나 역시 밥 반 공기와 아삭한 김치 한 보시기, 구운 김이 전부인 조촐한 저녁 식사를 마친다. 고양이들과 내가 말을 나누는 법은 없다. 우리는 침묵의 사제들이다. 가구들은 거실 제 자리에 있고, 베란다에 내다 건 빨랫감은 잘 말랐다. 등을 끄니 거실엔 고요가 가득. 눈치 빠른 고양이들도 잘 때라는 걸 알아차린다. 오늘도 무사하게 지났어. 곧 겨울이야! 나는 들을 누구도 없는 거실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지독히 심심하고 충만한 늦가을의 하루가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