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회 한중시가제(韓中詩歌祭) 참관기 - 오정국 시인
산과 바다를 건너 시의 우정을 나누다


한국과 중국 시인들의 교류 행사인 제1회 한중시가제가 지난 12~15일 중국 칭다오에서 열렸다. 개막식에 참가한 양국 시인들. 한국시인협회 제공.
한국과 중국 시인들의 교류 행사인 제1회 한중시가제가 지난 12~15일 중국 칭다오에서 열렸다. 개막식에 참가한 양국 시인들. 한국시인협회 제공.


1. 과월산해 선시선우(跨越山海 宣詩宣友)

지난 11월 12일 오후 1시 5분,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여객기가 중국 산둥반도(山東半島)를 향해 날개를 펼쳤다. 하늘은 맑고 바다는 푸르렀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황해라고 부르는 바닷길 너머의 산둥반도는 신라 때부터 교역이 활발했고, 지금도 교민과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곳. 한국시인협회 회원 30명은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교류가 잦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가장 가까운 대도시이며 항구도시인 칭다오(靑島)에 발을 내디뎠다.

칭다오는 평범한 어촌마을이었으나 원나라 때 해상 운송을 편리하기 위해 산둥반도를 가로지르는 교래운하(膠萊運河)을 파게 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독일에게 패배하여 독일 식민지가 되었고, 1919년 파리강화 회의를 통해 독일의 통치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항일 운동을 일으켰던, 중국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낸 곳이다. 한국 현대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고난을 견뎌낸 지역에서 개최된 제1회 한중시가제(韓中詩歌祭). 그 의미가 각별하게 느껴졌다.

우리 회원들은 3박4일간 머무를 리징반디엔호텔(麗晶酒店·Regency hotel)에 여장을 풀고 첫 행사장을 향했다. 만찬장 스크린의 머리글자 ‘跨越山海 宣詩宣友(과월산해 선시선우)’, ‘산과 바다를 건너온 시를 벗하여 우정을 기리는’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5시, 한중시가제 개막식과 환영 만찬이 시작됐다. 칭다오인민대외우호협회가 주최한 이 행사엔 중국 문학인과 시 관계자, 언론계 인사 40여 명이 참석했다.

쉐징궈(薛慶國) 산둥성 정협상무위원은 ‘환영사’를 통해 “시는 국경이 없고, 문화적 전승도 서로 이어진다. 한국 시인들이 칭다오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유구한 역사 문화, 왕성한 발전 활력을 많이 느껴서 우수한 문학작품을 만드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류창수 칭다오 총영사는 “이곳 산둥성 출신인 모옌에 이어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됐다”며 “시는 문학의 꽃이다. 디지털 문화가 심화 중인 현대 사회에 따뜻한 심성과 풍부한 감성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축사를 전했다.

한국시인협회 김수복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한국문학과 중국문학은 오래전부터 교류해왔으며 그 문학적 유대는 매우 공고하다”며 “양국 시인들이 위기에 처한 인류를 위한 문학을 함께 깨우쳐 나가자”고 했다.

한국시인협회 이근배 평의원의 인사말이 이어졌고, 이건청 평의원은 <산양> 이란 시를 낭송했고, 윤석산 평의원은 <눈보라> 를 읊었다. 이에 화답하듯 중국의 장띠 시인은 <시간의 비밀> 을, 사이청 시인은 <신성한 기쁨> 을 낭송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만찬장의 대형 스크린엔 양국의 언어가 동시에 비춰졌고 동시통역되기도 했는데, 판치즈(范奇志) 칭다오시 외무국장의 개막 선포와 오세영 평의원의 건배 제의로 제1부 행사가 막을 내렸다. 이때부터 둥근 식탁에 둘러앉은 참가자들은 담소를 주고받으며 중국 전통요리를 들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지곤 했다. 양국 시인들이 수십 년 만에 시를 통해 우의를 다진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칭다오에서 열린 제1회 한중시가제 환영 만찬.
칭다오에서 열린 제1회 한중시가제 환영 만찬.


2. AI 시대, 시의 미래를 논하다

이튿날 11월 13일은 오로지 ‘시의 날’이었다. 강행군이 시작됐다. 우리는 전세버스를 타고 시내 ‘양우책방(良友書坊)’으로 이동했다. 1901년 설립된 탑 모양의 5층 건물이었는데, 독일이 우체국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책방엔 산둥성 출신 작가들의 신간과 희귀본 책, 옛 엽서가 꽂혀 있었다. 칭다오에서 발간된 잡지 표지와 산둥성 출신 연예인 인물사진이 벽에 가득했다. 배우 공리의 데뷔 무렵 얼굴이 이채로웠다.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회원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건물의 역사처럼 고풍스런 장식들이었고, 우체국이었던 만큼 누군가에게 때늦은 엽서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전 9시, <동아시아 시와 글쓰기의 미래> 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다. 칭다오신문미디어그룹이 주최한 이 행사엔 조선족 중국 시인들도 대거 참석했다. 80여 명의 청중은 3시간 동안 발표 단상을 지켜봤다.

세미나 첫머리는 박덕규 단국대 명예교수의 라는 주제 발표였다. 박 교수는 “시조와 시, 노래에 담긴 한국인의 핵심적인 정서의 번역과 소통”을 거론하면서 “글로벌 시대를 맞아 한국의 ‘님’이 이민족 간의 갈등 해소를 위한 문화적 상징이 될 가능성”을 짚어봤다.

베이징대 교수 장띠 시인은 <동아시아 시가의 트렌드> 를 통해 “중국시의 전통 관념이 시 창작에 구속을 준다”며 이를 뛰어넘는 현대의 혁신적 창작기법에 관한 고뇌를 토로했다. 루예 시인은 <중국에서의 여성으로서의 글쓰기> 를 통해 남성 언어의 폭력성을 지적하며 “남성을 의식하는 글쓰기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이청 시인은 를 거론하면서 “AI는 번역과 분석 능력은 뛰어나지만 창작 능력은 인간의 감각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가오지엔강 시인은 <중한 시의 공통점과 다른 점> 을 통해 “우수한 시인은 모어(母語)의 속박을 이겨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졌다.

이들 발표자의 논점은 ‘시와 인공지능의 충돌 속에서 시의 미래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로 집약됐다. 창밖의 날씨는 쌀쌀했지만 세미나장은 후덥지근했다. 시를 향한 열기가 주위를 감쌌다.

신작 시집 발표회를 마친 한국 시인들이 중국 언론과 인터뷰하고 있다.
신작 시집 발표회를 마친 한국 시인들이 중국 언론과 인터뷰하고 있다.


3. 시 쓰기의 고뇌와 기쁨을 함께 한 시간

이날 오찬은 칭다오시조선족협회가 마련했고, 아침부터 동행한 조선족 문인들과 한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눴다. 양우책방 5층에서 오후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그 타이틀은 <시인들의 신작 공유회 및 독자 간담회> . 한국시인협회 김수복 회장의 『봄날의 의자』를 비롯해 유자효 평의원의 『포옹』, 오세영 평의원의 『황금모피를 찾아서』가 소개됐다. 이들은 신작 출간 소감과 창작 배경, 시적 지향점을 독자들에게 전했고, 독자들은 시 쓰기의 고뇌와 기쁨을 함께 나눴다.

중국의 루예 시인은 『큰 눈이 문을 닫게 했다』라는 시집을 손에 들고 “산둥지역 폭설을 소재로 한 시편이다. 마음의 갈등을 산과 바다를 통해 표현했다”고 말했다. 장띠 시인은 시선집 『가장 아름다운 배꽃은 가장 더럽게 쓰여질 것이다』를 소개하면서 “퇴폐한 개체가 행하는 속된 사회와의 싸움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순식간에 동시통역이 지나갔기 때문인지, 그 의미가 잘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시가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시인과의 질의응답이 오갔다. 시의 고전적 음악성과 현대적 불협화음, 전통적 정서와 당대적 표현, AI의 기능과 인간의 감성 등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시종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였고, 곧이어 저자 사인회가 열렸다. 양국의 참가자들은 저자 증정본을 가슴에 안고 인근 바닷가로 또는 가로등 불빛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숨 가쁜 하루가 저물고, 우리는 칭다오인민대외우호협회가 주최한 만찬장에 들어섰다. 대형 홀의 둥근 테이블에 한국시인협회 회원과 조선족 문인이 섞여 앉았다. 그토록 오래 헤어져 살았던 조선족 문인들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겨레말’의 소중함을 생각해보았다. 조선족이라는 구인숙 수필가는 “중국어로 글을 쓰지만 원초적 감정은 윗대로부터 받은 게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우리는 건배를 했다. 중국 전통주도 있었지만 맥주잔을 들고 칭다오를 외쳤다. 칭다오가 독일의 식민지였던 1903년, 독일인들이 자국의 설비와 기술을 들여와 빚은 맥주. 그 맥주가 ‘칭다오 맥주’로 유명해진 것인데,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이곳의 지하수로 빚은 술이기에 세계적 브랜드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칭다오 미카엘 성당 앞에서 김수복 한국시인협회장(맨 왼쪽) 등 동료 시인들과 함께.
칭다오 미카엘 성당 앞에서 김수복 한국시인협회장(맨 왼쪽) 등 동료 시인들과 함께.


4. 신선이 노닐던 바위산의 발자취

11월 14일, 이틀간의 공식 행사를 끝낸 우리는 문화유적 탐방을 나섰다. 첫 행선지는 시내에서 30Km가량 떨어진 라오산, 그 산기슭에 자리 잡은 도교의 총본산지 태청궁(太淸宮)이었다. 라오산을 한자로 쓰면 뫼산(山)에 애쓸로(勞)를 합한 ‘산 험할 노’가 들어가는 노산. 그 뜻풀이처럼 기암절벽의 돌산이 솟아 있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한다며 백성을 괴롭혀서 ‘노산(勞山)’으로 불렸고, 별자리의 아름다움을 바위에 가뒀다고 하여 ‘우리 뇌’를 앞세운 ‘뇌산(牢山)’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이곳 주민들은 “태산이 높다 해도 동해의 노산만 못하다”고들 한다는데, 이는 과장된 것이다. 노산은 해발 1,133m, 태산은 1535m다.

노산이 ‘국가삼림공원’으로 지정되고 나서 ‘해상명산(海上名山)’, 또는 ‘해상선산(海上仙山)’이라도 부르기도 하는데, 공원 버스는 30여 분간 바닷가 벼랑길을 굽이굽이 돌았다. 숨을 죽인 채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태청궁 입구 정류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바닷가로 내려갔고, 초기 도교 지도자들이 은거하여 도를 닦던 사원을 들어섰다. 좌우엔 삼청전(三淸殿)과 삼황전(三皇殿), 삼관전(三官殿) 등 도가의 신들을 모신 사당이 있었고, 곳곳의 돌탑과 수령 1,200년의 은행나무가 하늘을 우러르게 했다. 태청궁 꼭대기엔 높이 83m의 노자상(老子像)이 세워져 있었다.

칭다오 시내 양우책방에서 담소를 나누는 한중 시인들
칭다오 시내 양우책방에서 담소를 나누는 한중 시인들


5. 친구에겐 원근이 따로 없으니

오후 들어 비가 내렸다. 우리는 서둘러 ‘칭다오문학관’을 찾았는데, 서가엔 산둥성 출신 문인들의 작품집이 작가별로 꽂혀 있었다. 모옌(莫言)의 소설집을 비롯해 여성시인 어양장허(歐陽江河)의 시집 『유리공장』이 눈에 띄었다. 지역 문예지 『청도문학』이 창간호부터 전시되어 있었고, 벽에는 이곳에서 발행된 잡지 표지와 옛 서당 사진들이 가득했다. 지역문학과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 우리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특정 작가 중심의 문학관도 필요하겠지만 지역문학을 보존하며 정체성을 연구하는 장소도 요망된다 하겠다.

다음 행선지는 칭다오 미카엘 성당. 붉은 지붕의 독일식 건물이 도열한 언덕길, 기념품 가게를 지나자 쌍둥이 첨탑의 십자가가 보였다. 한때 중국에선 건물에 십자가를 세우지 못하게 했으나 여기만은 예외였다고 한다. 이곳 거주 한국인 등 외국인에 한해 주일 미사가 허용되고, 성당 마당은 웨딩 촬영장소로 인기라고 한다.

빗줄기가 거칠어지고, 해가 저물었다. 청도에서의 마지막 밤, 한국 시인들만의 만찬이 마련됐다. 회원들은 지난 사흘간의 여정을 떠올렸고,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을 함께 나눴다. 흥취를 풀어내듯 무대로 나가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아리랑 춤사위가 어우러지기도 했다. 그럴 즈음, 칭다오방송국과 신문이 한중시가제를 보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회원들은 이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시를 써서 중국 측에 보내기로 했고, 중국에선 이 시편들을 받아 기념시집을 펴내기로 했다.

이번 행사를 칭다오시에 제안하고 현지 사정을 살펴준 신형근 전 칭다오총영사와 김금용 시인에게 감사드린다. 행사를 주최한 지밍타오(紀明濤) 칭다오신문미디어그룹 회장과 관계기관 단체, 통역을 맡아준 이향 씨의 노고에도 머리를 숙인다. 11월 15일, 한국시인협회 방문단이 칭다오 자오동 국제공항을 떠날 때, 이번 한중시가제 개막사의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친구에겐 원근이 없으니 비록 만리에 떨어져 있어도 이웃이다(相知無遠近 萬里尙爲隣)’가 그것이다.

한중시가제에 참가한 한국 시인 30여 명이 숙소인 리징호텔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중시가제에 참가한 한국 시인 30여 명이 숙소인 리징호텔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필자 오정국은 198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내가 밀어낸 물결』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눈먼 자의 동쪽』,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등을 펴냈다. 시론집 『현대시 창작시론 :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 『야생의 시학』이 있다.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 경북예술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언론사에서 1984년부터 2001년까지 재직했고, 이후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다. 한국가톨릭문인협회 제 16기 회장을 지냈다.>
장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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