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미국 과학저널 ‘판단과 결정’에는 텍사스대 연구진이 수행한 흥미로운 연구 논문이 실렸다. 많은 사람이 장기적으로 얻는 큰 이익보다 당장 눈앞의 작은 이익을 선택한다는, 상식과 다른 실험 결과였다. 특히, 해당 논문이 더 화제가 된 이유는 득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그룹이 더 단기적 이익을 원했다는 점이었다. 무엇을 해야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분명한 상황에서도 눈앞의 만족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를 일반화하고 싶지 않지만, 묘하게도 현재 국내 밸류업을 둘러싼 상법 개정안 논란과도 닮아 보인다.
이사 충실의무를 주주로 넓히거나 감사위원 분리 선출을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은 기업의 미래 성장과 주주의 장기 이익보다 단기 이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법이 개정될 경우 이사가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 등을 결정하기라도 하면 이를 빌미로 외국의 투기자본이 과도한 배당을 요구하거나 경영권 다툼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업은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자사주를 사 모을 수밖에 없고, 단타 수익을 기대하는 세력이 대거 유입되면서 비정상적으로 주가가 오를 수 있다. 줄곧 40만 원대였던 주가가 경영권 다툼에 단숨에 100만 원을 넘어섰던 고려아연의 사례와 유사해 보인다. 밸류업에 따른 정상적인 상승은 아니었다. 단기 급등에 주주들은 환호했겠지만, 경영권 분쟁이 끝나고 세력이 빠져나가도 유지될지는 의문이다. 이미 유상증자를 추진했다가 철회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그만큼 경영권 분쟁을 위한 자사주 매입이 회사 운영에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의미다. 앞으로도 고려아연에서 기업의 미래에 투자해 배당받는 정상적인 주주권리를 누릴 수 있을까. 경영권 분쟁 이전에 고려아연은 당기순이익 30% 이상을 꾸준히 배당해왔던 주주친화적 기업이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행동주의 펀드의 캠페인에 따른 미국 기업의 가치를 분석한 결과, 3년 이내 단기적으로는 기업가치가 1.4%포인트 개선됐다. 그러나 4년 이후엔 2.4%포인트 악화했다. 단기 수익을 내야 하는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로 배당을 크게 늘려 당장은 좋아 보이는 듯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과 연구·개발(R&D) 투자 여력이 줄면서 기업가치가 하락한 것이다.
물론 국내 기업들의 주주 환원율은 선진국에 비해 낮다. M&A 과정에서 주주에게 단기적 손실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자본시장법 개정 등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상법 개정안은 주요 선진국은 도입하지 않는 법안이다. 상법 전문가조차도 반대한다. 그만큼 예상 부작용이 큰 탓이다. 상법 개정을 바라는 이는 금융 투기자본과 단기 이익을 추구하는 작전세력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개미들도 손해 보는 구조다. 기업들의 주주환원은커녕 공멸할 수도 있다. 상법 개정은 단타로 수익을 내고 싶은 주주들의 욕망과 이를 의식한 정치권의 포퓰리즘이 합쳐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유다.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 고기를 잡는다는 ‘갈택이어(竭澤而漁)’ 격이다.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해 미래를 보지 못하면 기업의 밸류는 ‘업’보다는 ‘다운’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