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철강, 석유화학, 전자에 이어 자동차, 반도체까지 우리 산업의 경쟁력이 약화하고 중국의 추격은 거세다. 반기업 정서, 과도한 규제와 함께 경영권 승계·방어의 애로로 주력산업을 다시 일으키고 미래 신산업을 개척해야 할 기업가들의 의지도 흔들린 지 오래다. 우리나라는 적대적 인수·합병(M&A)에 관해 공격은 자유롭고 방어 방법은 미비한, 독특한 제도를 갖고 있다. 최근 고려아연과 MBK파트너스·영풍의 경영권분쟁은 기업방어 제도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미국의 1980년대는 무차별적인 적대적 M&A 공세가 범람하며 ‘기업사냥의 암흑기’라 불렸다. 1982년 엘파소 일렉트릭이 제너럴 아메리칸 오일의 공격에 시달리는 모습은 미국 재계에 큰 충격을 줬다. 우량기업들마저 경영권 탈취의 공포에 떨던 상황을 막기 위해 월가의 전설적인 변호사 마틴 립톤이 고안한 포이즌필(Poison Pill) 제도가 도입되는 계기가 됐다. 기존 주주에게 할인가격의 주식매입 권리 등을 부여, 잠재적 인수자의 지분을 희석시키고 인수 비용을 높이는 방어책이다. 레녹스는 1983년 브라운포먼의 공격을 ‘특별누적배당’ 방식의 포이즌필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포이즌필은 현재 미국 기업들의 핵심 방어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불과 6년 만에 포천 500대 기업의 60%가 채택했고, 그 덕분에 무분별한 적대적 M&A는 급격히 감소하게 됐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외환위기 수습 과정에서 적대적 공격을 막기 위한 규제는 대부분 폐지됐으나 방어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논의만 무성할 뿐 도입되지 못했다. 고려아연은 비철금속 분야 세계 1위 기업이자, 2차 전지 소재 등 첨단산업의 중추 기업이다. 이런 기업조차 사모펀드의 공격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자사주 매입이나 우호세력 확보 정도가 허용될 뿐, 이마저 법적 제약으로 인해 실효성 있는 방어가 어렵다. 상법과 자본시장법이 기업 경영자들의 손발을 묶어놓은 채 언제든지 가능한 투기자본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시키고 있는 셈이다.
인수시도 대상이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기업이고, M&A를 시도하는 펀드나 기업이 중국·중동 등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해외 자본과 연결돼 있다면 경제안보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기업사냥꾼이 적어도 자국 자본에 바탕을 뒀던 1980년대 미국 상황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이제 정부와 국회는 ‘한국형 포이즌필’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경영권 방어가 주주이익을 침해할 것이 걱정된다면 주총 승인 등 보완장치를 마련하면 된다. 첨단소재, 정보기술, 인공지능(AI), 바이오, 방산 등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에 대해서는 경제안보 차원의 더욱 강화된 보호 장치도 강구해야 한다. 산업경쟁력 약화와 경제안보의 위협에 대한 대비에 정부와 국회가 실기하지 않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