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앙겔라 메르켈·베아테바우만 지음│박종대 옮김│한길사
동독 출신으로 물리학 전공
환경부장관·당대표 등 거치고
獨 첫 여성총리로 ‘무티’ 호칭
“큰 그림부터 명확히 보여줘라”
2010년 ‘그리스 구제안’ 배경
트럼프·푸틴과의 일화도 실려
2009년, 연방하원 총선을 위해 찍은 선거 광고 영상에서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장기 총리를 맡았던 앙겔라 메르켈이 내뱉은 첫 문장이다. 총리가 아닌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 향후 독일을 넘어 유럽연합(EU)에서도 막강한 리더십을 보여준 그이기에 의외였던 발언. 그러나 그의 삶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이내 수긍이 간다. 그가 자랐던 동독에는 총리라는 말이 없었다. 1989년 통일을 마주한 그에게 총리라는 자리는 다른 나라의 행정부 수반을 의미했다. 그뿐만 아니다. 그는 동독 시절 물리학과를 전공하고 과학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동독 출신의 여성, 그것도 물리학도였던 그는 어떻게 ‘독일판 철의 여인’이 됐을까. 그간 수많은 책이 메르켈을 다뤘고 그의 리더십과 정치 행보, 인생사는 모두 이야기가 됐다. 다만 우리는 그의 입을 통해 이 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출간된 그의 첫 회고록을 통해 메르켈은 지난 70년을 스스로 돌아본다.
그 시작은 동독의 공산주의다. 서독 함부르크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2개월 만에 동독으로 이주한 메르켈은 독재 정권을 몸으로 느꼈다. 유년 시절부터 독재를 겪은 그에게 저항과 민주주의를 향한 염원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다소 의외인 그의 물리학 전공도 이해가 간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사실을 왜곡할 수 없는 분야인 자연과학, 즉 물리학은 그에게 사회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1989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통일의 순간 그는 정치로 나아갔다. 독일의 정치적인 통일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그는 시민단체 ‘민주주의 각성’에 뛰어들었고 동독 마지막 정부의 부대변인을 거쳐 초선 하원의원이 됐다.
책의 구성은 그의 생애와 맞닿아 있다. 동독에서의 35년과 통일 독일에서의 35년이 정확히 절반씩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그의 유년시절과 인생사도 흥미롭지만 관심이 쏠리는 것은 역시나 후반부다. 통일 이후 총리가 되기 전까지 그의 경험은 이후 그가 총리로 재임하며 펼친 행보로 연결된다. 메르켈은 한스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교장관이 통일 독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일단 목표를 설명하고 큰 그림을 명확히 보여준 다음,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는 이후의 정치 인생에서 큰 역할을 하는 깨달음이다. 실제로 2010년 그리스에 대한 구제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대안이 없다’는 용어를 쓴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그리스에 대한 원조의 필요성을 위해 ‘대안이 없다’는 화두를 던지고 설득에 나서며 원조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2015년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면서도 그는 독일의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합법적인 이주는 필수적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실행에 옮겼다.
여성청소년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 당 대표를 거쳐 2005년 메르켈은 마침내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다. 대학에서 소련-동독 간 송유관을 연구하던 물리학도는 독일과 러시아를 잇는 가스관 ‘노르트스트림2’의 설치를 승인하는 총리 자리에 오를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러시아어 배우기를 좋아했던 한 소녀는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신경전을 벌이는 ‘철의 여인’이 됐다. 총리가 된 이후 메르켈은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세계 지도자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만났는데 그 막전막후의 이야기가 책에 등장한다. 버락 오바마와 도널드 트럼프, 블라디미르 푸틴과 시진핑(習近平), 그리고 우리에겐 다소 아픈 추억으로 남은 위르겐 클린스만까지.
특히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미묘한 관계는 오랜 기간 이어졌다. 2000년 베를린에서 당 대표 자격으로 첫 만남이 이뤄졌다. 그리고 2007년 총리로서 뮌헨 안보회의에서 만난 푸틴은 ‘기준점이 미국에 있는 지도자’였다. 푸틴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공격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뱉어댔고 메르켈은 책을 통해 “무엇보다 그의 독선에 화가 치밀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EU와 지리적으로 이웃 국가이고 교역 또한 이어가야 하는 강국이었다. 메르켈은 가스관 노르트스트림2와 같은 러시아와의 교류에 대해 “당시 독일과 많은 EU 회원국들은 기업과 가스 사용자들이 다른 공급원에서 더 비싼 가스를 수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평가는 유독 야박하다. “모든 것을 부동산 사업가의 눈으로 판단”하고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성향의 정치인에게 매료된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메르켈은 2017년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국방비 부담 문제로 대치하기도 했다.
2021년 12월, 메르켈은 퇴임했다. 스스로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긴 여정을 보낸 후 내놓은 첫 이야기는 ‘자유’다. 출판사에 따르면 메르켈과 그의 편집부는 고집스럽게 책의 표지에 ‘자유’ 단 두 글자만 쓰길 강조했다고 한다. 자유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뜻밖의 선물이자 지향점이다. 삭막한 동독에서 그를 구해낸 것이 자유다. 이웃과 공동체, 우리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 또한 그가 추구하던 자유다.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는 젊은 정치인에게 ‘구체적인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마지막 조언을 건넨다. 이 책은 그 실천에 가깝다. 독일인들 사이에서 그가 ‘무티’(Mutti, 어머니)라고 불리며 사랑받았던 이유가 아닐까. 768쪽, 3만8000원.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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