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한 학부모가 두 자녀와 함께 ‘영어유치원계의 에르메스’라 불리는 서울 서초구 소재 한 영어유치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유진 기자
지난 26일 한 학부모가 두 자녀와 함께 ‘영어유치원계의 에르메스’라 불리는 서울 서초구 소재 한 영어유치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유진 기자


■ 사교육 양극화의 단면 : 영어유치원 4만명 시대

<上> 기저귀 못뗀 채 ‘영유’ 입학

“빅5 초등영어 학원 들어가려면
3세 반서 시작해야 엘리트코스”

일부선 영재테스트 성적표 요구
입학자격 얻으려 ‘N수’ 하기도

사교육 진입 연령 점점 낮아져
“경쟁 과열… 교육 격차도 심화”


지난 19일 서울 강남구 E 영어유치원 입학설명회에서 만난 A 씨의 ‘돌쟁이’ 딸은 아직 이유식을 먹고, 낮잠을 하루 두 번 1시간 30분씩 자고 있다고 했다. 엄마 손에 의지해 겨우 몇 발을 뗄 줄 알고, 이제 막 ‘엄마’ ‘맘마’ 정도의 말을 한다. 유치원 원장은 낮잠 시간이 따로 없고 원어민 수업 때는 아이가 힘들 수 있다고 했지만, A 씨는 1개월 원비 200만 원과 함께 입학 신청서를 바로 제출했다. 내년 ‘3세(만 2세) 반’이 거의 다 찼다는 말에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A 씨는 “아이가 어려 적응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혹시 오늘 신청을 안 했다 나중에 대기가 걸리면 못 다닐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14일 부산 해운대구의 한 영어유치원 입학설명회에서 만난 B 씨는 16개월 된 아들의 이름으로 바로 예약금을 걸었다. 매년 1월에 학기를 시작하는 이 영어유치원 3세 반은 ‘20개월 이상’이라는 입학 조건이 있지만 “20개월이 차면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대기 신청이라도 하고 싶다”며 상담을 요청했다. “빈자리가 나면 입학이 가능하고 오늘 신청하면 입학금을 할인해 주겠다”는 원장의 말에 B 씨는 설명회가 끝나자마자 예약금을 보냈다.

유치원 신입생 모집이 이뤄지는 11월 학부모들의 ‘영유(영어유치원) 러시’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29일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총 3만7395곳으로 10년 전에 비해 28.7% 감소했다. 반면 영유아 대상 영어학원, 이른바 영어유치원은 2018년 562개에서 올해 6월 831개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3월 기준 전국의 ‘영유생(生)’은 4만1846명에 달한다. 만 2∼6세 인구 중 2.7%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유 러시는 전국 학부모들의 ‘사교육 조급증’을 자극하며 사교육 시장 진입 연령을 빠르게 낮추고 있다.

◇‘3세 반’의 등장 = 그동안 5∼7세를 겨냥해 왔던 영어유치원들이 최근 ‘3세 반’을 개설하면서 새로운 ‘엘리트 코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서초·강남구 등에 지점을 둔 유명 G 영어유치원이 3세 반 수업을 열면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 유치원은 ‘대치동 빅5’ 초등학생 대상 영어학원 ‘레벨 테스트’ 합격률이 높은 곳으로 주목받으면서 ‘영유계 에르메스’로 통한다.

G 영어유치원은 3세 입학생보다 5세 정원을 적게 두고 있는데, 3세 반 원생들에게 5세 반 입학을 위한 레벨 테스트 응시 기회를 우선 제공하고 있다. 이에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5세 반에 들어가려면 3세 반은 필수’라는 인식이 생길 정도다. 이 영어유치원은 3세 반을 선착순으로 모집하고 있다. 신청 경쟁이 치열해 학부모들은 연차를 내고 PC방을 향하거나 25만 원짜리 대행 알바를 섭외하기도 한다. 올해 남편과 함께 선착순 신청에 참여했다는 김모(36) 씨는 “손이 느려 1분을 살짝 넘은 시간에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유치원으로부터 대기 30번대라는 말을 들었다”며 “해가 갈수록 3세 반 경쟁이 치열해지고 대기도 많아지는 것 같다”고 한탄했다.

◇“영어는 빠를수록 좋아” = 현장에서 만난 부모들은 만 2세 자녀를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이유에 대해 “영어 노출이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고 설명했다. B 씨는 “10년 전만 해도 영어 공부는 5살부터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더 이상 아니다”라며 “‘4세 고시’라고 불리는 영어유치원 5세 반 레벨 테스트를 통과하고 그 후 쏟아지는 영어 공부에 아이가 부담을 느끼지 않으려면 말이 트이기 시작하는 15개월부터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노출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A 씨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언어 발달이 빠른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영어에 노출해 주면 아이가 영어를 공부라고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어차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한다면 5살이 되기 전 영어뿐만 아니라 책상에 앉아 공부 습관까지 잡아주는 곳으로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영재테스트 ‘N수’까지 = 일부 영어유치원이 입학 전 영재테스트 ‘성적표’를 요구하면서 부모들 사이에서는 유치원 입학이 곧 ‘영재 인증서’가 되기도 한다. G 영어유치원은 자체 개발한 영재테스트 상위 5% 안에 들어야만 ‘4세 고시’인 5세 반 입학 레벨 테스트 응시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또 다른 영어유치원도 입학을 위해 ‘카우프만 지능검사’ 상위 15%의 점수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들이 유치원이 ‘프리미엄 영유’라는 명성을 얻은 배경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G 영어유치원 영재테스트는 향후 3개월 예약이 마감되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일부 학부모들은 아직 부모와 떨어지기 힘들어하는 4살 아이들을 시험장에 들여보내고 있다. 자녀가 상위 5%를 받을 때까지 영재테스트 ‘N수’를 이어가기도 한다. 영어유치원 입학을 위해 자녀가 3번의 영재테스트를 치렀다는 김모(34) 씨는 “첫 시험은 32개월 아이가 시험장에 들어가자마자 울어 치르지 못했고, 두 번째는 아이가 테스트를 위한 그림을 제대로 보지 않아 상위 5%를 받지 못했다”며 “계속 원하는 수준을 받지 못하다 보니 절망스러웠고 아이가 미워 보이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강남구 대치동 등 유명 학군지에서는 ‘영어유치원 3세 반 입학→5세 반 레벨 테스트 통과→초등학교 입학 전 대치동 ‘빅5’ 초등 영어학원 레벨 테스트 통과’가 영어 교육의 ‘정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이곳 2세 아이들은 한글도, 걸음마도, 심지어 기저귀도 채 떼지 못한 채 영어유치원으로 향하고 있다. 박주형 경인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3∼5세는 공공 교육기관에 의무적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이 시기 교육은 전적으로 학부모의 선택에 따라 이뤄진다”며 “3∼5세 때 영어 노출을 중시하는 풍조가 생기면서 영어유치원 열풍은 계속되고 있고, 입학 연령도 어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율·노수빈·김유진 기자

관련기사

조율
노수빈
김유진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