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승’의 송강호.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영화 ‘1승’의 송강호.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야구, 골프 영화도 힘든데 과연 비인기 종목인 배구 영화가 될까?

스포츠 영화는 처음부터 일정 정도 ‘한계가 있다’는 편견을 짊어져야 한다. 첨단 시각특수효과(VFX)와 화려한 판타지 픽션으로 구현된 상업영화가 많기에 ‘승부의 세계’라는 틀을 넘을 수 없는, 어느 정도 결말이 예상되는 스포츠 드라마는 관객의 선택을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로나19 이후 최근 2년간 스포츠 영화는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다.

올해는 치어리딩을 소재로 한 ‘빅토리’가 있었지만 누적 관객 50만 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걸그룹 출신으로 통통 튀는 매력의 이혜리가 전면에 나섰어도 별수 없었다.

지난해 개봉한 3편도 사정은 비슷했다. 홈리스들의 축구를 다룬 ‘드림’, 손기정과 서윤복의 마라톤 도전을 그린 ‘1947 보스톤’, 농구 전국대회 준우승 실화극 ‘리바운드’ 등이 경쟁했으나 평범했다. 코미디로 정평이 난 이병헌·장항준 감독과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 박서준·아이유·하정우·임시완·안재홍 등 대중적 인기와 연기력을 겸한 스타급 배우들이 총출동했지만 100만 명 안팎의 흥행을 기록하는데 머물렀다. 스포츠 종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땀과 눈물, 환희와 감동에 충실했으나 역시 ‘한계’가 있어 보였다.

스포츠가 흥미진진하고 박진감이 넘치는 것은 현장성과 의외성 때문이다. 축구에서 흔히 ‘공은 둥글다’고 하는 것처럼, 예상 외의 변수가 벌어져 감동의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월드컵에서 약팀이 강팀을 꺾는다든지,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가 막판 끝내기 홈런을 친다든지 하는 경우다. 이걸 현장에서, 혹은 TV 생중계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감동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예측 불허의 승부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영화 ‘1승’의 장윤주(오른쪽)와 선수단을 연기한 출연배우들.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영화 ‘1승’의 장윤주(오른쪽)와 선수단을 연기한 출연배우들.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그러나 이게 일단 스크린으로 옮겨지면 현장성과 의외성이라는 가장 큰 장점이 빛을 잃게 된다. 심지어 실화 기반의 작품일 때는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어 ‘쪼는 맛’이 떨어진다. 따라서 감독들은 승부의 이면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게 마련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등장인물간의 갈등, 이를 둘러싼 환경 등이다. 이 과정에서 전문용어로 ‘초’를 친다.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감정을 과잉하고, 눈물을 짜낸다. 아예 분위기를 코미디로 돌려 웃음에만 집중하기도 한다. 그만큼 스포츠 영화 만들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 다음달 4일 개봉하는 ‘1승’은 별 기대가 없었다. 2년 전 개봉하려다가 코로나19 때문에 못했던 ‘창고영화’였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한 배구가 소재. 국내 프로배구리그인 V-리그는 KBO리그(프로야구), K리그(프로축구), KBL(프로농구) 등에 비해 주목도가 매우 낮다. 2005년에야 출범해 야구, 축구보다 역사가 짧고 팀도 남녀 각 7팀씩 14개팀 뿐이다. 지난겨울 시즌 V-리그 관중 수는 약 58만 명에 불과했다. 프로야구는 올해 1000만 관중 시대를 열었다. 상대가 안 된다.

그런데 ‘1승’에서 ‘국가대표’ 냄새가 난다. ‘국가대표’는 2009년에 개봉해 무려 8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던 흥행 영화다. 역대 스포츠 영화 중 최다 관객 기록이다. 생소한 종목인 스키점프를 소재로, 김용화 감독이 연출하고 하정우가 주연했다. 하정우가 미국 입양아 출신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가 국가대표로 합류하는 인물 차헌태를 맡았다. 오합지졸 같은 선수들이 모여 처음엔 삐걱거리다가 도전에 성공하는 이야기다. 물론 스포츠 영화의 전형적인 구도를 벗어날 순 없었으나 등장인물들의 간곡한 사연, 스키점프에 대한 관심과 흥미 유발, 적절한 유머와 위트 등이 잘 어우러져 호평받았다. 특히 감정이나 눈물이 과잉으로 흐르는 ‘신파’의 수위를 적당히 조절해 깔끔했다. 입양아 등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신파의 배경을 지니고 있는데도 김 감독은 절제된 연출로 감정을 붙들었다. 분위기가 너무 심각하게 갈 것 같으면 어느새 재치있는 웃음으로 신파를 걷어냈다.

‘1승’에도 감정의 과잉이나 신파 같은 건 없다. 여자배구 선수들이 주인공이라 더욱 눈물이 많을 것도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울고 싸우는 대신 프로스포츠엔 어떤 현실이 도사리고 있는지, 배구의 묘미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과학적인 데이터로 보여준다. 극중 등장하는 전력분석시스템 같은 것이다. 배구를 몰랐던 관객도 이해할 수 있다.

영화 ‘1승’의 박정민.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영화 ‘1승’의 박정민.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송강호, 박정민, 장윤주의 연기도 담백하다. 송강호가 연기한 김우진 감독은 그동안 많은 영화에서 다뤄져 왔던 캐릭터다. 처음엔 재벌 2세 구단주(박정민)의 무리한 요청에 맞춰 그냥 시간을 ‘때운다’. 좀 있으면 좋은 대학팀으로 가기로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수들의 열정과 개인적인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을 고쳐먹게 된다. 그리고 1승이라는 모두의 목표를 향해 진심으로 나아간다. ‘배드 빌런’이었다가 각성해서 ‘진정한 영웅’이 되는 인물. 지극히 전형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연식 감독과 송강호는 김우진 감독의 인물 설정에 많은 고민을 한 듯하다. 영화 내내 김우진 감독의 리얼리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 배경에 감정의 과잉이나 신파가 전혀 없는 덕분이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송강호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개연성 있는 대사로 분위기를 진정시킨다. 그러니까 더욱 신뢰가 간다. 박정민도 처음엔 전형적인 코미디 캐릭터로만 보였다. 구단을 매각해서 돈이나 벌려고 하는 재벌 2세의 허황한 모습을 연기했다. 그러나 점차 진정성을 가진 인물로 진화했다. 다 뜻이 있었던 입체적 인물로 살아났다.

스포츠 영화로서 다이내믹한 비주얼도 눈여겨 볼만하다. 가장 칭찬할 대목은 ‘메가 랠리’ 부분이다. 상대편의 서브로 시작된 랠리가 상당히 오랜 시간 박진감 있게 펼쳐진다. 카메라가 공을 따라다녀서 마치 관객인 내가 코트 위에 서 있는 기분이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7대의 카메라를 썼다고 한다.

‘국가대표’는 물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과 ‘말아톤’(2005) 이후 오랜만에 잘 짜인 스포츠 드라마를 만나게 돼 반갑다. 스포츠 영화가 이런 식으로도 감동과 재미를 줄 수 있다는 모델이 될 것 같다. 한동안 흥행에 목말랐던 국민배우 송강호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김인구 기자
김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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