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환의 음악동네 - 황가람 ‘나는 반딧불’

날이 차고 어두운데 노랫소리 들린다. 건성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실력은 제법이고 성의도 충만하다. 그런데 들어주는 사람이 없구나. 종종걸음으로 지나던 사람이 안 해도 될 말을 내뱉는다. “이 시간에 대리라도 하지.” 나는 속으로 변호한다. ‘그냥 부르게 해주세요. 임영웅도 한때 저랬다던데요.’ 그 시각에 대리운전 가던 사람도 그 얘기 들으면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러니 서로 가던 길 가자. 담벼락 아래서 노래 부르는 사람, 대리 부르고 불리는 사람, 누군들 크고 작은 사연이 없겠는가.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가곡의 제목은 ‘동무 생각’이 아니라 ‘고향 생각’(현제명 작사·작곡)이다. 고향은 태어나면 생기지만 동무는 살아가며 생긴다. 고향은 내가 떠나도 고향이지만 친구는 내가 떠나면(그가 떠나면) 그만이다. 고향은 내가 늙고 빈털터리라도 대충 받아준다. 추운 날 가로등 아래서 열창하던 그 청년도 아마 고향 같은 친구가 그리웠을 거다.

“왜 사냐.” 오래된 친구라면 삼갈 질문이다. 여섯 글자 추가하면 이별 예감이다. “도대체 왜 그러고 사냐.” 시인(김상용)은 달랐다. ‘왜 사냐건 웃지요’ 간결한데 여운이 남으니 슬기로운 답변이다. 시의 제목도 우문현답의 연장선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음악동네에도 크고 작은 창이 존재한다. ‘큰 창으로 햇빛받는 사람 많지만 나는 작은 창으로 햇빛받는다’(신형원 ‘작은 창’) 들어주는 사람 없는 노래를 길에서 부르는 무명 가수, 그런 처지를 벗어나 이젠 암표상 때문에 골치 앓는 인기 가수. 음악동네는 요지경 세상의 축소판이다.

‘작은 창’을 작사·작곡한 사람은 ‘홀로 아리랑’을 만든 한돌(본명 이흥건)이다. 방송사 다닐 때 사보에 글 하나를 기고한 게 인연이 됐다. 당시에 내 마음을 홀린 노래가 ‘개똥벌레’였다. 시작부터 비루하고 비장하고 결국은 비범했다.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 걸’ 수필의 제목을 ‘개똥벌레의 세계 인식’이라 붙였더니 이런 얘기가 들렸다. “대중가요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네.” 그리고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발신인은 놀랍게도 ‘개똥벌레’를 만든 한돌이었다. 노래의 끝은 울분과 탄식(‘쓰라린 가슴 안고 오늘 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 든다’)인데 편지의 끝은 감사와 희망이었다. “공감해준 누군가가 있으니 행복합니다.” 그때부터 나는 노래 채집을 즐겼고 가끔 이런 말도 했다. 곤충(개똥벌레) 채집은 곤충을 죽이지만 노래(개똥벌레) 채집은 노래를 살린다.

오늘 포획한 노래는 다른 이름의 개똥벌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중략)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제목 ‘나는 반딧불’을 음원에서 찾으면 중식이, 황가람이 나란히 뜬다. 중식이(밴드)는 싱어송라이터, 황가람은 이 노래를 널리 알린 가창자다. 내친김에 중식이가 만들고 부른 ‘여기 사람 있어요’도 들어봤다.

‘여기 사람이 있어 무너진 건물 당신 발밑에 그 아래 난 살아 있죠 부서져 좁은 텅 빈 공간에 날 살려 줘요’ 소름이 돋는다. 이건 모든 청춘, 모든 노래의 SOS다. ‘내가 죽었다 말하지 마요 나는 아직 숨을 쉬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너를 다듬고 너를 알려라. 지금 잘나가는 사람 너무 부러워하지 마라. 잘나가는 사람의 미래는 잘나가던 사람이다.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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