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김태웅 지음│휴머니스트
정치가·이방인·기자·학자·서민…대한제국 5인의 기록
식민통치에 자결한 황현·‘민중 계몽’ 눈돌린 윤치호 등
역사의 변곡점마다 제각기 다른 시각으로 사건 바라봐

기시감이 들 수도 있다. 책의 서문에 적힌 이 문장은 마치 작금의 세태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이는 약 150년 전 이 땅에 존재했던 역사를 요약한 말이다.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구렁텅이에 빠진 망국이자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화를 꾀했지만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대한제국 말이다.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약 14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이곳에 사는 ‘그들’의 삶은 시대 못지않게 혼란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가운데 5명, 윤치호와 귀스타브 뮈텔, 정교와 황현, 지규식을 통해 제국 수립부터 국권 상실까지의 과정을 세밀히 복원한다.
대한제국사를 깊이 연구해온 저자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세심하게 선별한 다섯 인물은 서로 다른 처지와 관점에서 시대를 기록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윤치호는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윤치호일기’는 서구 문명과 조선의 현실을 비교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독립협회 활동을 주도했던 그는 사회 개혁을 모색했지만,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의 침략에 협조한 행보로 비판을 받은 양면적인 인물이다. 프랑스 출신 천주교 주교인 뮈텔은 어떠한가. 뮈텔주교일기(뮈텔일기)로 잘 알려진 그는 천주교의 확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했던 이방인이다.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도 대한제국의 정치적 변화를 면밀히 관찰했던 그는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종교적 중립성을 강조하며 정치적 참여를 자제하는 태도로 전환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절에도 사회에는 지식인과 언론인이 있었다. ‘매천야록’의 저자인 황현은 전통적 유교 사상가로서, 대한제국의 몰락과 일제의 침탈 과정을 개인적 비극으로 받아들여 상세하게 글로 남겼다. 경술국치 직후 자결한 그의 행위는 조선 지식인의 절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그런가 하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에 참여한 정교는 ‘대한계년사’를 남긴 당대의 기자였다. 그의 기록은 훗날 민중의 목소리와 사회적 변화를 생생히 전달하는 자료가 됐다. 마지막은 평범한 상인, 수많은 백성 중 한 명인 지규식이다. 그는 격변의 시기에 생업을 이어가며,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서 갈등과 두려움을 겪은 ‘보통의 사람’이었다.
1897년 고종의 아관파천 후 수립된 대한제국에는 여러 변곡점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러일전쟁(1904)은 제국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었다. 러일전쟁으로 일본은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고 전쟁 후 을사늑약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대형 사건 중심에서 근대화 시기 독립협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정부와 갈등했던 윤치호는 일본의 승리를 인정하며 이를 실리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뮈텔은 일본의 승리를 기회로 바라봤다. 전쟁 중 일본의 승리를 예견한 그는 천주교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집중해 천주교인의 안전과 교세 확장을 모색했다. 황현과 정교는 일본의 침략을 강하게 비판하며 저항하기도 했다. 황현은 일본의 군사적 개입과 을사늑약 체결을 비판하며 이를 “국망의 시작”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 체결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국가의 권리가 사라지자 민중과 의병의 분노는 거세졌다. 당시 황현은 의병 활동을 “민중의 정의감”으로 묘사하며 자신은 문인으로서 조국의 멸망을 한탄했다. 의병 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지규식은 생업을 이어가며 일본군과 의병 사이에서 생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저항 운동은 각 인물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황현이 정의로운 저항으로 표현한 의병 활동에 대해 윤치호는 비현실적인 감정 대응으로 보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몰락했다. 1910년 식민통치가 시작된 해에 황현의 자결은 국망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조선 정부에 우호적이었던 뮈텔은 일본과 협력하며 천주교 재산과 신도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했고 윤치호는 일본의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이며 민간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돌리는 등 이들의 삶도 전환점을 맞았다.
그러나 책은 대한제국의 몰락을 단순히 패배의 역사로 규정하지 않는다. 무능한 지도자를 둔 국가에 망국의 조짐이 드리울 때도 이곳에는 외교 관계를 고민했던 정치인과 종교인, 진실을 기록하려 했던 언론인과 한 나라의 운명을 그 백성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지식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말이다. ‘그들’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시대를 바라보게 된다. 928쪽, 4만4000원.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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