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민의 정치카페 - 국민의힘 탄핵 트라우마

박근혜 탄핵이 문재인 폭정 불러… 여, 보수궤멸·정권상납 트라우마 속 ‘탄핵 반대’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 정리 위한 ‘신속한 재판’ 촉구하며 ‘질서 있는 하야’ 논의 박차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사태는 군사정권의 유산을 45년 만에 불러냈다는 점에서 과거 박근혜 정권의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그런데도 지난 주말 여당인 국민의힘은 ‘윤석열 탄핵’ 반대 당론을 결의·실행함으로써 8년 전 ‘박근혜 탄핵’ 당시와는 정반대의 결정을 했다.

왜 그랬을까. 탄핵 이후 몰아친 국민 분열의 트라우마, 보수 궤멸의 쓰라린 교훈, 박 정권 붕괴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권에 의한 폭정의 기억이 이재명 집권 우려를 자극한 결과인 것으로 분석된다. 여당은 탄핵 반대 기조를 유지하면서 윤 대통령 퇴진 로드맵과 관련한 당론 수렴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트라우마 1

탄핵과 관련한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새로 지은 사회는 부숴버린 사회보다 우월한가.’ 이는 혁명으로 건설된 사회가 혁명 전 과거의 질서보다 나았느냐는 에드먼드 버크의 문제 제기다. 이 질문은 문재인 집권 시기의 기억 속에서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박근혜 정부 붕괴 이후 새로 들어선 문 정부의 국정 횡포가 빚어낸 극도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재인은 박근혜 탄핵 국면이자 대선 직전인 2017년 초 펴낸 책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대통령의 3대 과제를 통합·경제·안보 세 가지로 꼽았다. 하지만 세 가지가 다 지켜지지 않았다. 5년 내내 보수 대청소를 부르짖으면서 국민을 촛불과 적폐로 나누고 갈라치기 했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괴이한 성장론으로 경제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북한 정권 눈치 보기와 대중 저자세로 안보를 헌납하고도 “삶은 소대가리 앙천대소” 조롱을 들었다.

‘새로 지은 사회는 부숴버린 사회보다 우월한가’라는 철학적 질문은 문재인 시대의 기억과 역사적 반성을 거쳐 ‘이재명의 민주당에 정권을 상납하는 게 맞느냐’는 현실적 질문으로 옮아갔다. 여당 중진인 주호영 국회부의장은 “지난 주말 우리 당이 탄핵 반대 당론을 결의하고 실행했던 데에는 박 정부 탄핵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권의 폭정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현재 국회 압도적인 의석을 가진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의 집권 공포로 연결됐다는 설명이다.

현재 윤 대통령의 임기 단축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닫는 형국이다. 문제는 대통령의 조기 탄핵이 8개 사건·12개 혐의로 재판 중인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잠재우고 그의 조기 집권을 도울 수 있다는 점이다.

◇트라우마 2

2016년 12월 당시 여당 의원의 절반 가까이가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수용해 박근혜 탄핵에 찬성했다. ‘보수=40%, 박근혜 콘크리트 지지층=20%’ 공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 후과(後果)는 컸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이 결정되자 ‘탄핵정당 프레임’이 급속히 형성됐다. 보수 진영은 대선(2017년)-지방선거(2018년)-국회의원 총선거(2020년)에서 내리 참패하면서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탄핵에 찬성했던 여당 의원들이 새로운 보수정당(바른정당)을 창당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생존하려 발버둥 쳤지만 ‘제로 그라운드’의 폐허 속에서 재기하는 데 실패했다. ‘배신자론’에 갇힌 정치인들이 줄줄이 낙오했고 그중 상당수는 영영 정치판에 돌아오지 못했다. 보수 진영은 분열과 반목 속에서 오래 내전을 치렀고, 외부로부터 긴급 수혈된 윤석열 후보가 2022년 대선에서 0.73%포인트 차로 승리하기 전까지 좌파 장기 집권이 현실화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감내해야 했다.

이번 ‘윤석열 탄핵 반대’ 당론 결정은 이 같은 역사 학습, 보수 궤멸의 트라우마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8년 전 박근혜 탄핵에 반대했던 여권 인사들 대부분이 윤 대통령 임기 단축을 위한 질서 있는 퇴진에는 찬성하더라도 탄핵만큼은 안 된다며 반대하고 나선 이유다. 나경원 의원은 “8년 전 아픈 기억이 생생하다. 탄핵만은 안 된다”고 했고, 오세훈 서울시장도 “탄핵만이 능사는 아니다”라고 입장을 냈다.

국민이 경험한 트라우마도 크고 깊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나라는 대혼란, 대분열로 치달았다.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싸우고 비난하면서 오랫동안 국민은 분열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조지 산타야나의 역사 관련 경구가 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 그 과거를 반복하는 운명을 겪게 될 것이다(Those who can 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비극적 탄핵의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할 때 탄핵의 비극성은 반복된다. 김태흠 충남지사는 9일 기자와 만나 “탄핵과 질서 있는 퇴진은 다르다”라며 “탄핵은 3족을 멸하는 대참사이지만 질서 있는 퇴진은 당의 미래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당 내부에서는 역사적 트라우마의 교훈 속에 탄핵을 피하면서 성난 민심을 다독일 방법, 이재명 조기 집권을 막기 위해 대선 시계를 지연시키면서 ‘윤석열 퇴진 로드맵’을 구체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조해진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대통령의 조기 퇴진이든 임기 단축 개헌이든 모든 것의 전제는 이재명 대표의 재판을 완료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 대표가 1심 선고를 받은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에 대한 최종심이 내려진 후 대통령의 거취가 결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의 지난 주말 탄핵 반대 당론은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국회 표결 당일인 7일 한동훈 대표와 중진 의원들은 ‘김건희 여사 특검법’ 표결 후 탄핵 반대 당론을 성공적으로 실행시키기 위해 ①순차 퇴장 ②집단 퇴장 ③투표에 참석해 반대표 행사 ④본회의장에서 기권 등 4개 방안을 놓고 논의해 ①을 채택했다.

여당 내에서 정국 해법을 놓고 백가쟁명식으로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큰 틀은 세워지는 것으로 보인다. ①‘탄핵 반대-질서 있는 퇴진’이라는 원칙 속에서 국민을 설득하고 ②차기 대선 전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정리되도록 법원에 ‘신속한 재판’을 촉구하며 ③제도적 협치가 가능한 권력구조 개편이 포함된 개헌 추진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단결이 중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거취를 당에 일임하겠다고 했는데 이것이 엉뚱하게 ‘한동훈-한덕수 공동 국정’ 논란으로 비화한 만큼, 조만간 자신의 거취를 국회 논의에 일임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할 필요가 있다. 지금 여권 구성원이 견지해야 할 원칙은 탄핵 반대와 질서 있는 퇴진 당론 결의, 그리고 선거법 관련 신속한 재판 촉구이다. 중요한 건 단결이다.

전임기자, 행정학 박사

■ 용어 설명

‘에드먼드 버크’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영국 정치인, 철학자. 저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펴내면서 보수주의 관점을 확립했고, 보수주의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음.

‘조지 산타야나’는 스페인 출생의 미국 철학자 겸 평론가. ‘비판적 실재론’ 등에 대한 논의로 T S 엘리엇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퓨리터니즘이 미국 문화에 끼친 영향을 비판한 저서들을 펴냄.

■ 세줄 요약

트라우마 1 : 윤석열 탄핵 문제는 박근혜 탄핵 이후 문재인 시대의 기억과 역사적 반성에 근거해 이재명 집권에 대한 우려로 이어짐. 윤 임기 단축은 불가피하나 탄핵 방식은 이재명 집권을 도울 수 있다는 공포 역시 큼.

트라우마 2 : 보수 진영은 박근혜 탄핵 후 극심한 분열 후유증 속에 대선(2017년)-지방선거(2018년)-국회의원 총선거(2020년)에서 내리 참패. 윤 탄핵 반대 당론은 이 같은 보수 궤멸의 트라우마와 긴밀히 연결돼.

무엇을 할 것인가 : 비극적 탄핵의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할 때 탄핵의 비극성은 반복. 여권은 ‘윤 탄핵 반대-질서 있는 하야-이재명 선거법 관련 신속한 재판 촉구’를 원칙으로 당론 수렴 박차. 중요한 건 단결임.
허민

허민 전임기자

문화일보 /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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