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훈 논설위원

위헌·위법적 계엄 사태 후폭풍
보수 가치 붕괴, 진영 위기 불러
법적 책임만큼 큰 정치적 책임

신뢰 붕괴 ‘질서 속 퇴진’ 난항
하야·탄핵 경로 스스로 결단을
여당 내분 막고 책임져야 도리


한국 보수주의의 사상적 빈곤을 모르지 않는다. 공화제로 이행한 경험이 서구와 다른 까닭이 크다. 그럼에도 굴곡진 역사 속에서 구해낸 보수의 유산적 가치들이 있다. 자유, 법치, 시장경제, 점진적 개혁, 도덕과 윤리, 생명과 가족, 애국심, 공동선, 자기 절제와 의무감 등이다. 18세기 영국의 근대 보수주의 시원이라는 에드먼드 버크가 강조했던 정치 주체의 훈육 요건을 현대 보수 정치인의 덕성으로 환치하면 이런 것이다. “대중의 눈으로 감사를 받는 것에 익숙하고, 여론에 주의를 기울이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경의와 관심을 끌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명예와 의무가 중요할 때 위험은 무시하고, 어떤 잘못도 처벌 없이 넘어가지 않고, 사소한 실수라도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조심성과 신중함이 있고, 조화로움의 미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년 반 전에 취임식에서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으로 반(反)지성주의를 지목하고, “조정과 타협, 과학과 진실이 전제된 정치”를 약속했을 때만 해도 그런 ‘보수의 품격’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가 강조했던 합리와 지성주의는 대통령실·관사 이전부터 흔들렸다. 지혜로운 사람보다 극단의 학자·역술인과 유튜브 방송을 더 경청했고, 정치 브로커에 휘둘렸다. 부인의 ‘사소한 잘못’도 단죄하는 제가(齊家)의 의무감이 없었고, ‘위법한 게 무엇이냐’는 항변에는 진실을 숨겼다.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고 했지만, 지지율이 52%(2022년 5월 1주, 한국갤럽)에서 13%(2024년 12월 1주)로 추락할 때까지 부적절한 처신과 오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의대 증원 2000명’엔 과학이 없었고, 참모들이 반대 의견을 낼 때마다 조정이 아닌 ‘버럭’의 독선이 들려왔다.

급기야, 지난 3일 야밤에 비상계엄 선포로 악몽 같은 ‘군홧발과 총부리’를 전 국민이, 전 세계가 생생하게 지켜보게 했다. 국무위원들의 반대에도 파멸적 결과를 경계하는 신중함과 자기 절제가 없었다. “대통령으로서 절박함”이라고 했으나 자유·법치쯤은 국가 원수의 권력으로 누를 수 있다는 오만과 오판에 젖어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랬겠냐”는 항변도 부정선거의 증거를 찾겠다고 중앙선관위를 급습했던 사실로 설득력을 잃었다. ‘처절한 도박’(가디언), ‘굴욕적인 실패’(포린폴리시)란 비판은 그렇다 쳐도, 일당 지배 중국의 관영 매체가 ‘서울의 겨울, 6시간 계엄령 희극’이라고 해대는 조롱까지 들어야 했는가.

윤 대통령은 “법적·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위헌·위법 행위의 법률적 책임은 당국 수사와 탄핵소추 여부로 가닥이 잡힐 문제다. 그보다 더 오래 씻지 못할 오류는 보수의 품격을 무너뜨린 정치적 책임이다. “국민이 국력과 체제에서 긍지를 느낄 수 있을 때, 또 전통적인 유산이 구심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보수주의가 힘을 얻는다.”(강정인 서강대 명예교수) 그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 군사정권의 잔영을 씻어내려 숱한 모욕을 견디고 다진 보수 가치가 허물어져 간다. 한국을 이끌었던 두 가지 축,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보수가 자부심을 가졌던 공적마저 왈가왈부할 정도로 진영의 위기를 불렀다.

품격을 잃으면 신뢰가 붕괴한다. “당에 일임하겠다”던 ‘질서 있는 퇴진’이 벽에 막힌 건 그 때문이다. 이제 당에 맡길 게 아니다. 자진사퇴를 하든, 아니면 탄핵소추를 자청해 법적 소명에 나서든 윤 대통령이 결단하고, 탈당까지 선언해야 한다. 당이 결정하면 어떤 경로에서도 책임 공방이 거세게 일고, 내분의 2차 후폭풍에 휩싸일 게 분명하다. 하야로 60일 이내 대선을 치르거나, 탄핵안 가결로 90(박근혜 전례)∼180일(헌법재판소법)의 심리 결과에 따른 정국이 전개되거나, 유불리를 저울질하는 정치공학은 이 시점에 보수다운 방식이 아니다. 설령 정권을 내주더라도 그 후과를 윤 대통령이 홀로 짊어지겠단 의지를 보여야 한다. 국민을 존중하지 않은 데 ‘속죄하는 대통령’, 보수의 품격을 무너뜨린 데 ‘참회하는 정치인’으로서의 도리다. 그게 조기 대선으로 5개 재판의 죗값을 일시에 무마할 수 있다고 들떠 있는 ‘이재명의 민주당’을 미몽에서 깨우는 길이다. 그게 보수 공멸을 막는 최소 요건이자 윤 대통령의 마지막 책무다.

오승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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