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adership - 감독 부임 첫해 프로야구 통합우승 이범호 KIA 감독
선수·코치 거쳐 감독으로 복귀
소속팀 선수들과‘동지애’공유
경기중 실수한 선수엔“파이팅”
팀 기강 해치는 선수는 불호령
코치 의견 충분히 수렴뒤 결정
“파트별 분업 확실히 자리잡아”
이범호(43) KIA 감독은 요즘 프로야구계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다. KIA의 통합우승을 이끈 이 감독은 여기저기 야구 시상식에 불려 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난 11일엔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 수여하는 지도자상을 받으며 정점을 찍었다. 한국체육기자연맹 지도자상은 야구는 물론 축구, 농구, 골프 등 현장을 누비는 체육기자들이 직접 뽑은 상. 야구뿐 아니라 타 종목을 취재하는 기자들도 이 감독의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했다는 의미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 감독은 ‘코치’ 신분이었다. 하지만 올해 2월 이 감독에게 갑작스레 1군 사령탑의 기회가 찾아왔다. KIA는 지난 1월 김종국 전 감독이 구단 후원사인 한 커피 업체로부터 억대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자 해고 조치했다. 이후 KIA는 면밀한 검토 끝에 이 감독을 1군 감독으로 선임했다.
선임 당시만 해도 우려의 시선이 몰렸다. 그러나 이 감독은 혼란과 동요를 안정적으로 수습했다. 이 감독의 가장 큰 무기는 KIA 선수단의 장단점을 훤히 꿰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구고를 졸업하고 2000년 한화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 감독은 2010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일본프로야구 소프트뱅크에 진출했다가 2011년 KIA와 계약하며 국내로 돌아왔다. 이후 이 감독은 줄곧 KIA 유니폼을 입었다. 2017년에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2017년 당시 ‘선수 이범호’가 5차전에서 두산 투수 더스틴 니퍼트를 상대로 결정적인 만루홈런을 터트린 장면은 아직도 회자된다. 2019년 현역 은퇴 후 미국과 일본 연수를 다녀온 이 감독은 2021년 2군 감독을 지냈고, 2022년과 2023년엔 1군 타격코치를 맡았다.
이 감독은 1군 사령탑 부임 전 코치 코스를 모두 밟은 ‘준비된 사령탑’이었다. 특히 선수들의 사소한 버릇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이 감독은 1군 사령탑 부임 후 장점을 더욱 발전시키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KIA의 전력을 업그레이드했다. KIA는 지난 6월 12일 순위표 가장 꼭대기에 오른 이후 단 한 번도 선두를 뺏긴 적 없이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전신인 해태 시절을 포함해 1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이 감독은 해태 시절을 포함해 타이거즈에서 뛴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든 사령탑이 됐다. 역대 KBO리그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같은 팀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건, 두산에서 우승 축배를 든 김태형 현 롯데 감독과 김원형 전 SSG 감독에 이어 이 감독이 세 번째였다. 이 감독은 아울러 2005년 선동열, 2011년 류중일(당시 삼성 감독)에 이어 ‘감독 부임 첫해에 통합 우승을 차지한 역대 세 번째 사령탑’이라는 진기록도 달성했다.
이 감독의 부드럽고, 상식적이며, 포근한 ‘형님 리더십’이 시즌 내내 빛을 뿜었다. 지난 7월 17일 광주 삼성전은 이 감독의 이런 리더십을 볼 수 있었던 대표적 장면이다. 당시 KIA는 5회 초 2사까지 9-5로 앞서 있었고, 선발 투수 양현종은 승리 투수 요건에 아웃카운트 1개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감독은 5회부터 급격히 구위가 떨어진 양현종을 마운드에서 내렸다. 양현종은 KIA는 물론 KBO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 양현종으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현종이 마운드에 내려온 직후 이 감독의 행동이 시선을 끌었다.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양현종의 뒤로 다가간 이 감독은 ‘백허그’를 하며 위로했다. 이 감독 특유의 애교스러운 표정은 덤이었다. 이 감독은 당시 “(양)현종아, 네가 막을 수도 있지만 다른 선수가 막을 수도 있으니, 같이 힘내자”고 얘기했다.
프로야구 감독은 대부분 강골이다. 선수단을 쥐락펴락하고,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고성을 지르는 감독도 부지기수. 감독의 말을 거역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감독의 의사와 다른 의견을 표현하는 것조차 금기시된다. 선수가 감독과 ‘말을 섞는’ 자체가 건방진 행동으로 비친다. 그래서 이 감독의 당시 행동은 특히 주목을 받았다.
비단 양현종뿐 아니다. 선수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고참들은 든든한 조력자였다. 최형우, 김선빈 등 고참들 대부분이 이 감독과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선수들. 이 감독이 선수에서 코치를 거쳐 감독이 됐기에 선수들과는 ‘동지애’를 공유했다. KIA 베테랑 최형우는 지난 3월 이 감독이 취임하자 “우승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리고 이들은 이 감독의 사령탑 데뷔연도 우승에 아낌없이 힘을 보탰다.
이처럼 이 감독은 권위와는 거리가 먼 사령탑. 평등을 중시하며 선수단과 늘 소통을 강조한다. 격의 없이 어울리면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선수들은 언제라도 감독실에 들어가 면담할 수 있고, 감독이 직접 선수에게 커피까지 내려준다. 또 가끔 ‘아재 개그’를 툭 던져 라커룸에서 웃음을 유도한다. 물론 이 감독은 모든 선수와 가깝게 지내지만 ‘편애’를 경계한다. 조직력에 균열이 생길 수 있고,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기 때문이다.
‘선수를 큰소리로 윽박지르고 질책하는 건 선수를 무시하는 태도’라는 게 이 감독의 평소 지론이다. 그래서 꾸중보다 칭찬을 더 자주 보내고, 단점이 아닌 장점에 주목한다. 실제 이 감독은 경기 도중 선수가 실수했을 땐 오히려 “파이팅”을 외치고, 좋은 플레이가 나왔을 때는 ‘손하트’를 마구 날린다. 이 감독은 “늘 KIA의 주인공은 선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 감독은 최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선수단의 중심은 감독이 아닌 선수”라면서 “팀과 선수 개인이 모두 발전하기 위해선 선수 스스로 동기를 찾아야 하고, 그렇게 유도하는 게 감독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이 감독도 참지 못하는 것이 있다. 선수로서의 기본을 잃거나, 조직에 누를 끼치면 가차 없이 불호령이 떨어진다. 땅볼이나 평범한 뜬공을 친 뒤에도 1루까지 열심히 달리지 않으면 호통이 날아든다. 타격 감각이 좋지 않다고, 잘 맞은 타구가 아웃 처리됐다고 인상을 쓰는 건 KIA 더그아웃에선 금기사항이다.
이 감독은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뒤 선수, 팬들 앞에서 ‘삐끼삐끼춤’을 선보였다. 이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우승을 차지하면 ‘삐끼삐끼춤 세리머니를 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다. 삐끼삐끼춤은 KIA 투수가 삼진을 잡을 때마다 치어리더가 음악에 맞춰 잔망스럽게 추는 춤. 감독으로서의 체통보다 고생한 선수들, 성원을 보내준 팬들에게 화끈하게 보답하길 원했다.
물론 이 감독은 마냥 ‘사람 좋은’ 스타일은 아니다. 번뜩이는 전략, 과감한 결단과 뚝심도 돋보인다. 이 감독은 올해 4∼5월 성적을 핵심 포인트로 짚었다. 타격코치 시절, 매년 6월 이후 타격 사이클이 살아났던 데이터를 주목한 것. 따라서 시즌 초반(4∼5월) 성적이 중요하다는 결단을 내렸다. KIA는 4∼5월 승부에 집중했고, 5월까지 치른 56경기에서 34승 21패, 승률 0.618로 전체 1위를 차지하며 정규리그 우승에 밑거름을 놓았다.
이 감독은 귀가 열려 있는 사령탑이다. KIA 관계자들은 “이 감독이 결정을 내릴 때는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여러 차례 검증을 거친다”고 입을 모았다. 전권을 쥐고 있는 사령탑으로서의 권위를 최소화했고, 코치진을 부하가 아닌 동료로 여겼다. 이런 면모는 코치진 의견을 듣는 데서 그대로 드러난다. 전략 수립이나 선수 기용 등에선 손승락 수석코치와 정재훈 투수코치, 홍세완 타격코치 등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며 이들의 생각을 존중했다. 이 감독은 “올해 통합 우승은 나 혼자 한 게 아니다. 파트별로 (코칭스태프의) 분업이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고 강조했다.
KIA는 지난달 3일 이 감독과 3년 재계약을 발표했다. 올해 초 2년 계약, 계약 만료 시점이 1년가량 남았지만 KIA는 새로 장기계약이란 선물을 안겼다. 계약 조건은 3년간 총액 26억 원(계약금 5억 원·연봉 5억 원, 옵션 6억 원). 이 감독은 부임 9개월 만에 ‘초특급’ 대우를 받게 됐다. 현재 10개 구단 감독 중 옵션 포함 최고 대우 계약이다.
이 감독의 목표는 왕조 구축이다. 이 감독은 한국시리즈 우승 후 언론사 인사에 각종 시상식 참석으로 바쁜 날을 보냈지만, 머릿속엔 늘 내년 시즌 전략이 담겨 있다. 이 감독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잠시 짬을 내 KIA의 오키나와 마무리훈련 현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 감독은 “선수들이 자만에 빠지지 않고, 우승을 향한 간절함을 만드는 것이 감독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우승팀은 올 시즌으로 끝이다. 내년 시즌 다시 도전해 우승할 팀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거만해지지 않고 다시 도전해서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닝·투구수 정확히 맞춰 합리적 마운드 운영… KIA 우승의 숨은 비결
‘책사’손승락·정재훈 코치
흔히 성공한 지도자 곁에는 뛰어난 책사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올해 통합 우승을 차지한 이범호 KIA 감독의 곁엔 손승락 수석코치와 정재훈 투수코치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올해 정규리그 개막을 앞두고 이 감독을 향한 의문부호는 ‘마운드 운용’에 있었다. 보통 야수 출신 감독은 투수 기용에, 투수 출신 감독은 야수 기용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
현역 시절 명투수 출신인 두 코치는 야수 출신인 이 감독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좋은 참모 역할을 톡톡히 했다. KIA는 ‘스포츠 과학’에 관심이 많은 두 코치가 합류하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마운드 운영이 가능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구파인 두 코치는 연구, 분석이 장기. 경기의 흐름을 한발 앞서 읽고 이를 분석해 이 감독에게 조언했다. 이 감독도 투수 파트의 전술전략은 코치들에게 의지했다.
정 코치는 선발진이 붕괴된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명확한 투수 운용 및 관리 기조를 이어가면서 마운드 붕괴를 막았다. 4월 중순부터 시즌이 끝날 때까지 풀가동된 불펜 역시 이닝·투구 수를 정확하게 맞춰가면서 이탈자 없이 시즌을 마무리했다. 손 수석코치는 투수코치의 의견에 힘을 싣고 이 감독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결과도 훌륭했다. KIA는 올해 팀 평균자책점에서 4.40을 마크, 전체 1위에 올랐다. 이렇게 시즌 내내 든든히 버텨준 마운드는 KIA의 숨은 비결로 꼽을 수 있다. 비단 두 코치뿐 아니다. 홍세완 타격코치를 비롯해 이동걸 불펜코치 등도 ‘착하면 착, 척하면 척’ 알아서 움직이며 이 감독을 보좌했다.
아무리 뛰어난 책사가 있더라도, 주군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이 감독은 코치진의 의견을 잘 경청하고 수용했다. 이 감독은 “지금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건 코치들의 탁월한 전력 분석 덕분”이라며 “우리 코치들이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조언을 자주 건넨다”고 설명했다.
정세영 기자 niners@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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