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논설고문

여의도·광화문의 열띤 탄핵 대결
우리 사회의 굳건한 시스템 주목
많은 중도파 시민이 지키는 일상

尹 실패일 뿐 李 성공은 아니다
민심이 당심 이길 때 보수 회생
시민의 견제·균형 심리 믿어야


지난 14일 오후 2시 30분 지하철 여의도역에 내렸다. 평소 출퇴근 시간보다 복잡했다. 엄청난 인파가 질서 있게 국회 정문 쪽으로 향했다. 경광봉을 들고 교통 정리하던 젊은 경찰들이 수군거렸다. “오늘은 사람 너무 많은데.” “탄핵 될 것 같아.” 집회에 등장한 ‘전국집에누워있기연합’ 등 1500여 단체 깃발 중 작은 것 하나가 눈에 띄었다. ‘대학원생노예연합’ 10여 명이 “윤석열을 체포하라”고 외쳤다.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유탄을 맞은 석박사 대학원생들이었다. 윤 대통령의 덜컥 정책이 남긴 상흔은 넓고 깊었다. 자업자득이다.

찬바람이 부는 오후 4시쯤 지하철로 광화문의 탄핵 반대 집회장으로 건너갔다. 연단에서 전광훈 목사가 “우리 시민들 힘으로 탄핵을 막는 시민혁명이 완성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한동훈 가족이 당 게시판에 내 욕을 하고 있다”며 배신자로 몰아갔다. 전광판에는 윤 대통령의 대국민담화가 동영상으로 흘러나왔다. 인파는 여의도 집회에 비할 바 못 됐지만,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열기는 뜨거웠다.

윤 대통령 담화는 ‘패악질’ ‘망국의 원흉’ 같은 선동과 함께 논리적 오류로 넘쳐났다. “거대 야당 대표의 유죄 선고가 임박하자 대통령 탄핵을 통해 이를 회피하고 조기 대선을 치르자는 것”이라며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음모론을 펼쳤지만, 공허하다. 앞뒤가 바뀐 억지다. 오히려 비상계엄이라는 위험한 불장난이 탄핵과 조기 대선을 불렀고, 이로 말미암아 대선 이전 이재명 대표의 유죄 판결도 불투명해져 버렸다. 소영웅주의 망상이 부른 모험주의일 뿐이다.

국민의힘의 여당 역할도 의문이다. 한덕수 내각은 야당 눈치를 더 살필 수밖에 없다. 내란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오른 데다 총리·장관은 야당이 마음만 먹으면 탄핵소추로 직무 정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선(死線)에 선 윤 대통령은 사방이 적이다. 검찰과 경찰은 조직 명운을 걸고 수사 경쟁을 벌인다. 법원은 2018년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주도한 사법농단 사건의 응어리가 맺혀 있다. 헌법재판소 탄핵보다 검·경의 구속 수사 여부가 발등의 불이다.

여의도와 광화문을 오가며 느낀 감정은 오히려 깊은 안도감이다. 우리의 사회 시스템이 그대로 돌아가는 걸 지켜봤다. 경찰과 역무원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통신량이 급증하고 있으니 동영상 시청을 자제해 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모두 스마트폰 사용 자체를 줄였다. 주요국들이 ‘여행 경보’를 발령했지만, 집회 현장엔 외국인이 적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의 성숙한 민주주의 현장을 호기심 있게 지켜보았다. 귀갓길에 버스 차창 밖으로도 압도적 다수의 시민이 가족과 휴일 저녁을 즐기는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동안 국민의힘, 특히 친윤은 “조기 대선은 필패”라는 공포 마케팅으로 정면 승부를 피하려 온갖 궁리를 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8년 전과 다른 분명한 사실은, 탄핵 집회의 규모와 열기가 덜하다는 점이다. 많은 중도 시민이 비상계엄 엄단을 원하면서도, 그렇다고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 역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 기반 시스템이 흔들림 없이 돌아가듯, 우리 공동체의 균형 감각과 견제 심리 또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탄핵은 윤석열의 실패이지 이재명의 성공이 아니다. 이 대표의 흠결은 윤석열과 적대적 공생으로 덮였을 뿐 사라진 게 아니다.

국민의힘은 민심이 당심을 압도할 때 중도를 끌어들이면서 승리의 기적을 일궈냈다. 100% 여론조사로 승부를 건 오세훈 서울시장 경선과 민심이 압도한 이준석 당 대표 당선 때가 그러했다. 반대로 ‘100% 당원 투표’를 폭압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자멸했다. 국민의힘이 윤석열식의 극우 모험주의와 단호히 결별하고 중도와 개혁신당까지 끌어안는 열린 자세로 바뀐다면 조기 대선이라도 결코 불리한 게임이 아닐 수 있다. 국회 192석이 넘는 거대 야당, 흠결을 가진 이재명 대표…. 과연 민심이 대통령 권력까지 넘겨줄지 지켜볼 일이다. 높은 확률로 강력한 견제와 균형 심리가 작동할지 모른다. 보수 정치권도 더 이상 ‘쫄지’ 말고 당당하게 정면 승부를 각오했으면 한다. 보수가 되살아나야 나라도 건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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