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 속의 This week
위인전 ‘퀴리 부인’으로 더 잘 알려진 마리 퀴리. 여성 과학자가 드물던 시절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그는 사회적 편견과 장벽을 넘어 여성의 가능성과 지위를 크게 높인 인물로 평가된다. ‘방사능의 어머니’로 불리는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 퀴리와 1898년 12월 26일 방사성 원소 ‘라듐’을 발견했다.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기 어려웠던 시대에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소르본대에서 공부했고, 졸업 후 물리학자 피에르를 만나 결혼했다. 1896년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에서 방사선을 발견했다. 부부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찾는 연구를 진행해 1898년 우라늄보다 더 강력한 방사선을 내뿜는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했다. 이 과정에서 마리 퀴리는 ‘방사능’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해 그 개념을 정립했고, 방사능 연구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1903년 남편 피에르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마리 퀴리는 당초 수상 후보가 아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아니라는 것이었지만, ‘여성은 과학을 할 수 없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그는 피에르가 수차례 탄원서를 올린 끝에 노벨상 첫 여성 수상자가 됐다.
1906년 마차에 치이는 사고로 남편이 사망하자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소르본대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된 마리 퀴리는 실의를 딛고 순수한 라듐을 분리하는 연구를 계속했다. 수천 번의 실험을 반복한 끝에 1910년 8t의 우라늄 폐광석을 처리해 0.1g의 순수한 라듐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과학적 발견은 인류 발전을 위해 공유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구 결과를 특허 없이 공개했다. 이듬해인 1911년 그는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시상식 전 남편의 제자였던 유부남 폴 랑주뱅과의 스캔들로 수상이 어려워질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결국 수상하며 업적을 인정받았다. 그는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주인공이며 서로 다른 분야(물리학과 화학)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과학자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방사선을 활용해 부상병의 진단과 치료를 지원했다. X-선 장비를 실은 차량 ‘리틀퀴리’를 제작해 훗날 노벨화학상을 수상하는 큰딸 이렌 졸리오퀴리와 함께 전선을 누비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전쟁이 끝나고 연구소로 돌아온 마리 퀴리는 건강이 점차 악화했다.
당시에는 방사능에 대한 위험성이 잘 알려지지 않아 특별한 보호 장비 없이 연구를 해와 지속적으로 방사선에 노출돼 결국 1934년 7월 67세에 재생불량성 빈혈로 세상을 떠났다. 동료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유명한 사람 중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애도했다. 프랑스의 국가적 위인들이 묻혀있는 판테온에 여성으로는 처음 안장됐고, 사망한 지 9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방출되는 방사선 때문에 그의 관은 3㎝ 두께 납으로 차폐돼 있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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