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허민의 정치카페 - 탄핵 정국과 개헌론
한국의 대통령제, 저주·분열·정신적 내전 초래…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으로 개헌론 재소환
탄핵 이전만큼 이후의 정권에 대한 우려도 커… 정치안정·사회통합 위한 전략적 개헌 논의 절실

◇죽음의 키스
한국의 대통령들은 희극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끝나는 역사드라마의 주인공들이었다. 독립운동의 상징인 국부 이승만은 망명했다. 산업화로 근대화를 일군 박정희는 수하에게 피살됐다.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해 집권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퇴임 후 단죄됐다. ‘1987년 체제’ 이후로도 대통령의 비극성은 그치지 않았다. 민주화의 기수 김영삼과 김대중은 아들들이 모두 재임 중 구속됐다. 특권과 반칙 반대를 내세웠던 노무현은 탄핵소추됐고 임기를 마친 후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명박은 문재인 정권의 적폐수사에 몰려 감옥 신세를 졌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탄핵됐다. 윤석열은 임기를 절반밖에 채우지 못한 채 탄핵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들 사정이 대개 그렇다. 중남미의 니카라과·볼리비아·브라질·아르헨티나·엘살바도르·온두라스·우루과이·파라과이, 아프리카의 세네갈·앙골라·이집트·잠비아·짐바브웨·카메룬·콩고·튀니지, 아시아의 방글라데시·라오스·레바논·시리아·필리핀 등 대통령이 통치하는 세계 40여 개 국가 대부분이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쿠데타나 내전을 포함한 극심한 갈등과 사회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만이 예외다. 카를 뢰벤슈타인은 “대통령제는 미국 국경을 넘는 순간 민주주의에 대한 ‘죽음의 키스’로 변한다”고 했다. 선진국 클럽인 OECD 37개국 가운데 대통령제 국가는 한국과 미국, 칠레·멕시코·콜롬비아·터키 등 6개국뿐이다. 나머지는 권력 분산형 정치체제를 채택한다.
대통령제는 왜 미국 외의 나라에서 문제가 될까. 미국의 힘은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는 ‘유전자적 차이’에서 나온다. ‘건국의 아버지들’의 집단지성이 녹아 있는 헌법 설계, 연방주의라는 탁월한 국정 운영 원리, 견제와 균형의 확고부동한 제도화, 민주주의 전통과 개인의 자유라는 문화적·역사적 요인이 권력을 분산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구조적 안정성을 제공한다.
◇소환된 개헌론
한국에서는 대통령의 비극이 발생할 때마다 개헌론이 분출했다. 요체는 제왕적 대통령 권력의 분산이었고, 연합정부나 연립내각을 통한 ‘협치의 제도화’에 방점이 있다. 1990년 ‘1노3김’ 체제에서 내각제 합의를 바탕으로 한 ‘3당 합당’, 1997년 내각제 이행을 전제로 한 ‘DJP 연대’ 등이 모두 이런 맥락에서 등장했다. 노무현은 탄핵소추를 경험한 후 ‘대연정’(2005년 6월)을 꺼냈고, 박근혜는 탄핵소추 직전 권력구조 개헌론(2016년 10월)을 제안했다.
이번 윤 대통령 계엄-탄핵 정국에서 개헌론이 다시 불붙고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지난 19일 외신기자들과 만나 “나는 원래 개헌주의자”라면서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 때문에 여러 오판과 대통령 주변에서의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역대 국회의장들 역시 대부분 개헌론을 부르짖었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4일 한국정치학회가 주는 제1회 국가지도자상을 받는 자리에서 제22대 국회를 괴물에 비유하면서 “거대 야당의 입법 폭주로 의회민주주의가 궤멸의 길로 들어섰고,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참극도 이런 상황에서 벌어졌다”며 “국민통합이라는 정치 본연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헌법을 바꿔 제도화하지 않으면 이런 역사가 또 반복될 것”이라고 했고,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역대 대통령들이 전부 불행하고 비극적으로 끝났는데, 이걸 되풀이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권의 대선주자인 안철수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도 권력분산 개헌에 찬성 입장이고, 야권의 김부겸·김동연·김경수 등 ‘신3김’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막는 개헌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지난 1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만나 “대통령 중심제가 우리 현실과 맞는지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략적 논의
결국 관건은 이재명 대표와 친명 진영의 태도다. 친명은 대부분 지금의 개헌론이 윤석열 탄핵에 대한 ‘물타기’라는 입장이다. 다만 친명 중에서도 ‘아직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개헌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친명 좌장 정성호 의원은 “현재는 윤 대통령 탄핵에 집중해야 한다”고 전제, “다만 이 대표가 집권하면 적절한 시기에 개헌 프로세스를 추진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역대 대통령들의 말로를 보면서 국민은 어느 때보다 권력 분산형 개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특히 조기 대선이 결정되고 반명·비명 주자들이 개헌을 고리로 선거동맹을 결성해 ‘이재명 포위 전선’을 펼친다면 이 대표의 결단이 빨라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개헌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 대통령이 임기 단축 개헌을 하겠다고 공약하고 실행할 여지와 동력을 확보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다음과 같은 안들을 상정해볼 수 있다.
#1. 탄핵 이후 대선 캠페인: 여야 대선 후보들이 ‘임기 중 개헌’ 공약을 내걸고 캠페인을 벌인다. ‘2028년 23대 총선과 대선 동시 선거’ 공약을 내걸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3년만 하겠다고 공약한다.
#2. 새 대통령의 결단: 당선된 새 대통령은 ‘과거 유산 청산 및 사회통합의 새 시대 개척’을 슬로건으로 개헌 추진 의지를 분명히 하고 국민적 설득과 여야 정치권에 대한 요구를 병행한다.
#3. 탄핵안 기각 때의 전략: 윤 대통령 스스로 임기 단축 개헌을 제안한다. 이 경우 ‘2026년 지방선거와 대선 동시 선거’가 유력하게 검토될 만하고, 그때까지 거국중립내각을 운영한다.
탄핵이 그렇듯 개헌 역시 고도의 정치적 과정이다. 개헌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려면 정치적 타이밍, 국민적 요구, 초당적 협력이 필수적이다. 개헌의 핵심 메시지는 ‘정치안정·권력분산·사회통합을 위한 변화’가 될 것이다.
◇탄핵 이후에 오는 것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시대착오적 계엄을 꿈꾸는 권력자뿐 아니라 다수의 폭정을 일삼는 국민팔이 정치인들 또한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말했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유지되는 한, 탄핵 이전만큼이나 이후에 들어설 권력 또한 걱정이라는 뜻이다. 박근혜 탄핵 이후의 문재인 폭정이 생생한 사례다.
전임기자, 행정학 박사
■ 용어 설명
‘1987년 체제’란 그해 6월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형성된 정치체제. 전두환의 대통령 간선제 호헌조치에 대한 반테제로 등장했고, 지금까지 권력구조 토대를 제공.
‘카를 뢰벤슈타인’은 나치 집권 후 미국으로 피란해 활동한 독일 출신 헌법학자이자 정치철학자. 하이델베르크대 연구자 시절 막스 베버의 제자였으며 이후 예일대 등에서 법·정치 등을 가르침.
■ 세줄 요약
죽음의 키스 : 대통령제는 미국 국경을 넘는 순간 민주주의에 대한 ‘죽음의 키스’가 돼. 제왕적 대통령제는 한국을 저주와 갈등, 분열과 내전 상태로 내몰아. 역대 대통령들은 비극으로 끝나는 역사드라마의 주인공들.
소환된 개헌론 :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사태와 탄핵 정국에서 개헌론이 다시 소환됨. 역사적 경험으로 미뤄 그 요체는 대통령 권력의 분산임. 정치체제로는 연합정부나 연립내각을 통한 ‘협치의 제도화’에 방점.
전략적 논의 : 개헌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건 대통령이 임기 단축 개헌을 공약하고 실행할 여지와 동력을 확보하는 것. 제왕적 대통령제가 유지되는 한, 탄핵 이전의 권력만큼 이후 들어설 정권에 대한 걱정은 그대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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