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5 신춘문예 - 소설 심사평
홍수처럼 넘쳐나던 응모작들의 경향을 먼저 살펴보면, 하나는 ‘경계 허물기와 공존’. 자연과 인간 간의 경계, 국경, 국적, 피부색, 계층 간의 경계 등 복잡하게 얽혀 그어져 있는 경계로 인해 발생한 분노와 좌절감, 경계를 접점화하고자 하는 분투.
올 응모작들에서 새롭게 눈에 띈 경향 중 하나인 ‘가면을 쓴 인격인 페르소나에서 교묘하게 진화한 가면과 가식 고발’.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노동 혹은 생존 공간을 확보하고 지켜내기 위한 분투’가 사실적으로 핍진하게 그려진 응모작들도 꽤 됐다. ‘세습되는 계층 간의 골 깊은 갈등과 화해 불가능한 대립’을, ‘세대를 넘어 우정과 위안, 온기를 나누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냈거나, ‘노인의 삶을 통해 쓸모가 다한 존재들이 어떻게 잊히고 폐기되는가’를 그린 작품들도 종종 보였다.
본심에서 집중해 읽은 작품은 ‘로우리아의 도넛’ ‘캐비닛 비우기’ ‘친칠라취급주의’.
‘로우리아의 도넛’은 경계 허물기를 관념적으로 그린 몽환적 분위기의 작품이었다. 보경이라는 인물이 페인팅을 통해 자연의 일부로 스며들어 가는 과정이, 그럼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겹쳐지는 과정이 좀 더 날카롭고 집요하게 그려졌더라면 보다 매력적인 예술가 소설로 읽힐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움을 주었다. 사진작가 필립이 갑작스레 광화문에서 죽음을 맞는 결말의 설정이 개연성을 떨어뜨려, 당선작으로 올리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캐비닛 비우기’는 분양사무소 아르바이트 신분인 금비와 그녀의 엄마, 이모, 그리고 분양사무소에서 전단지 돌리기를 하며 호객행위를 하는 ‘썬캡족’이라 불리는 여성을 통해 최소한의 ‘생존 공간 확보’에 대한 이야기. 원룸에 살던 금비가 엄마와 이모가 살고 있는 본가로 들어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거실 겸 부엌과 방 두 개짜리 집에 금비의 짐이 놓일 자리는 없다. 그녀가 분명히 확보하고 있는 생존 공간은 분양사무소 탈의실의 캐비닛 두 개. 그 안에는 금비가 원룸에서 쓰던 물건들이 들어 있다. 무력감에 길들여 있는 엄마, 이모와 다르게 생의 의지가 악착같은 썬캡족 때문에 금비는 캐비닛 하나를 잃게 될 위기에 처하며, 나이 든 자신이 썬캡을 쓰고 전단지를 돌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생계 최전선에서 계약제로 일하며 악지스러워진 여성들의 고투를 들여다보고 체화한 노력이 역력한 귀함이 있었다.
‘친칠라취급주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가면-외적 인격’에서 한층 진화한 가면 벗기기에 도달한 수작이었다. 어떠한 가면인가 하면, 감추기가 아닌 ‘드러내기 위한 가면’ ‘노출증적 가면’이다. 과장이라는 인물로부터 계약제로 일을 받아 영상편집 작업을 하는 여진에게는 현서라는 친구가 있다. 비건인 그는 아동발달 치료센터에서 운동 치료사로 일한다. 환경주의자에 이타적인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가 맡긴 친칠라를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여진은 현서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를 비로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멋진 친구로 오인했던 현서는 여자친구와 여진의 심리를 조종하고 통제하는(가스라이팅), 극단적일 만큼 이기적인 괴리적 존재. 여진의 집을 장악하고 옷을 먹으며 구멍을 내는 친칠라, 미디어 영상 속 모습과 영상 밖 모습이 판이한 유명 인기 의사, 현서. 성삼위처럼 동일한 세 인물의, 치밀하게 조작된 이미지와 위험하고 불온한 장악력이 개연성을 확보하며, 압축적이고도 짜임새 있는 한 편의 빼어난 단편소설로 탄생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요청받고 있는(있던) 주제를 고백체의 문장으로 차분히 담아냈다는 데 또한 적잖은 점수를 주며 당선작으로 올리는 데 모두 동의했다.
당선자께는 힘찬 축하의 박수를, 모든 응모자들께도 진심 어린 건필과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조경란·김숨·이서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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