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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신춘문예 - 평론

현실을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에게
‘프레임을 부수자’라는 말은 듣기 좋은 동시에 자못 허황되다.
여전히 건재한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인이 프레임을 부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무엇보다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 역시
개인에게 씌워진 하나의 프레임이 아닌지 우리는 깊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 갇힌 채 말하기

당신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육면체 하나가 있다고 가정하자. 육면체로 향한 당신은 그 안에 자리 잡는다. 자, 이제부터 당신은 그 육면체가 허용한 한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먹는 일, 잠자는 일과 같은 지극히 원초적인 행위뿐 아니라 일상을 이루는 모든 일을 육면체의 안에서만 수행해야 한다면, 그 상황을 납득할 수 있겠는가? 앞선 조건은 뭇사람들에게 그리 유쾌하지 못하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며, 심지어 듣는 이에 따라서는 불쾌감까지도 느끼게 만든다. 행동반경이 한정될 때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 내지는 반항심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이 육면체를 인식의 차원으로 끌고 와 추상적인 모양으로 다시 빚어낸다면 그것이 바로 ‘프레임(frame)’이다. 조지 레이코프는 본디 액자나 뼈대 등을 의미하던 단어에 가치 판단이라는 조건을 하나 덧붙여, 개인에게 주어진 언어적 구성틀은 특정한 방향으로의 신경회로망을 활성화시킨다는 프레임 이론을 착안했다.²

레이코프 이후 프레임은 개인이 어떠한 현상이나 사건을 자신의 안으로 투과시키는 도구로서의 용례를 새로이 획득했으나, 실사용 될 때의 맥락을 본다면 대부분의 상황에서 부정적인 뉘앙스를 내포하는 듯하다. 가상의 육면체가 당신을 물리적으로 가두었듯, 주어진 프레임은 사고를 제한해 그 이상으로 뻗어 나갈 여지를 차단해버리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벗어나는 일’은 오히려 진테제로 나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정(正) 혹은 반(反)으로 규정된 명제 너머에 있는 새로운 차원, 그곳으로의 지향. 마치 아포리즘과 같이 매끄러우며 타당하게 여겨지는 이 구조는 현실에서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2015년 발화(發火)되었던 페미니즘 리부트를 전후로 하여 페미니스트로 ‘각성’한 여성들은 기존의 가부장적이며 남성중심적이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것을 원했고, 한편으로는 강요당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현실을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에게 ‘프레임을 부수자’라는 말은 듣기 좋은 동시에 자못 허황되다. 여전히 건재한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인이 프레임을 부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무엇보다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 역시 개인에게 씌워진 하나의 프레임이 아닌지 우리는 깊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이제부터 살펴볼 세 명의 여성 시인―김민정, 이소호, 권박은 그러니 차라리, 짜여진 프레임에 갇힌 채 말하고자 마음먹은 듯하다. 각각 2005년과 2018년, 2019년에 출간된 그들의 첫 시집은 가부장의 한가운데 들어앉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발화(發話)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구조 안에서 구조를 말할 때 내보일 수 있는 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들은 이토록 명백하게 ‘여성’을 뒤집어쓰고 말하기를 택한 것일까.

◇ 그때 그 ‘아가씨’에게 -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페미니즘 리부트의 불씨가 지펴지기 딱 10년 전인 2005년, 우리 문학장은 이미 젠더에 대한 탐색을 시작할 준비를 마친 채였다. ‘미래파’라고 불리던 이들의 등장은 문단이 채비를 서두를 수밖에 없던 확실한 계기일 테다. 한 세기가 저물고 마침내 맞이한 밀레니엄. 변화를 추동하는 들뜬 움직임은 한국의 젊은 시인들에게서도 발견되었는데, 그들은 기존의 시가 담지하던 일인칭과 재현의 감각을 뒤엎고 자아의 외연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특히 ‘무성(無性)에의 지향’은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보이던 특징 중 하나로서 수차례 거론되었다. 시 속 화자들은 그 어떤 형이하학적 질서나 정체성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다채로운 젠더를 수행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은 생물학적 성차를 탈피하고 여성이면서도 남성인, 한편으로는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분열적 자의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³ 그렇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6년에 황인찬이 지적하고⁴ 양경언에 의해 구체화 되었듯⁵, 무성을 통한 비인칭의 등장은 “어쩌면 젠더 평등의 관점을 견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성”적인 관점으로의 합일이 용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⁶ 것이 아니냐는 필연적 의혹을 예견하고 있기도 했다. 설사 2000년대 이후 한국 시가 그 어떤 의도 없이 순수하게 다성성(多聲性) 혹은 무성성(無性性)을 호명했다고 할지라도, 이미 편향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형성된 동향은 시적 주체의 여성성을 거세하는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의 남성형을 탄생시키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월경 직전의 유방통처럼 피와 나만이 알아채는 떨림으로 밤이 몸을 뒤튼다 깨진 틈새로 단백질 찌꺼기 낀 충치와 잇몸을 얼리는 냉동고의 호흡 때론 담요처럼 폭신폭신한 혀가 대기 속에서 오래 머문다 까끌까끌한 윤곽의 엉클어진 실선들 제 구두점을 다 갉아먹고는 꼬리와 꼬리끼리 접붙이기 시작하고 말라비틀어진 창자 속에 펌프질하는 입김으로 팽글팽글 팽그르르 회전의자처럼 산란 중인 꽃병은 터질 듯 한껏 팽창한 곡선을 부풀린다 그 검은 간장독 속을 나는 젓가락으로 푹푹 찔러본다 찐득찐득한 타르가 흘러 내 머리카락에 눌어붙는다 녹아 고무 타는 냄새……의 사닥다리를 타고 긁어도 파지지 않는 그림자들 파근파근 나의 거푸집으로 건너온다 - 「잠들어 거울 속에서 눈뜬 검은 나나」 부분

이후의 담론을 참고하였을 때,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에 꿋꿋하게 버티고 선 여성 화자는 맹랑하며 또한 특이하다. 김민정 시의 화자는 젠더를 매개로 각종 실험이 행해지던 시류 속에서 무성으로서의 주체를 내세우기보다는 자신의 생물학적 여성성을 떳떳하게 전시한다. 모두가 프레임을 벗어나고자 애쓰는 복판에 꼿꼿하게 선 한 명의 ‘아가씨’. 이 아가씨는 여성의 몸, 그리고 그 몸을 통해 감각할 수 있는 통증을 과잉이라고 느껴질 만큼 시의 곳곳에 흩뿌린다. 그는 “월경 직전의 유방통처럼 피와 나만이 알아채는 떨림”이 무엇인지 안다. 그에게는 “끄뭇끄뭇한 소음순”이 있고, 비록 “사랑스러운 난자 대신 눈알들이 자라”(「멀리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날지언정 자궁이 있다. 즉 화자는 여성의 몸으로 특정지을 수 있는 신체를 가진 듯 보이며, 그 몸으로부터 비롯된 증상들은 산발적인 이미지로 구체화되어 “내 머리카락에” 또 “나의 거푸집으로” 건너와 눌어붙는다. 씻어낼 수조차 없는, “찐득찐득한 타르”와 같이 말이다.

사방에서 남자애들이 코를 싸쥔다 채 오줌을 갈겨댄다 선생님이 막대기로 남자애들의 머리통을 탕탕 후리더니 날 안고 화장실로 간다 어김없이 선생님은 내 교복블라우스 앞가슴 새에 입술을 비벼 넣더니 단추 하나를 먹어버린다 걱정 마 도로 달아줄게 교복 블라우스 단추를 다 먹어치운 선생님이 내 젖꼭지를 꼬집어 뜯더니 동글동글 반죽하기 시작한다 봐 선생님이 단추 만들어준다고 했잖아 아니 아니 실 바늘은 못 만들잖아요 나는 호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 선생님의 손등을 꾸욱 하고 찍어버린다 구멍난 손등을 면도칼로 잘라 신주머니에 넣으며 나는 매일매일 학교에 간다 - 「나는 안 닮고 나를 닮은 검은 나나들」 부분


여성의 신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김민정의 화자를 여성이라고 확정하는 것은 자칫 논의를 생물학적 근본주의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마저 살펴야 한다. 그는 남성인 동급생을 “남자애들”이라고 콕 집어 부르며 타자화한다든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을 “언니”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젖을 먹는 아이가 자신의 젖꼭지를 깨물어 피를 내더라도 “이가 없는 네 잇몸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 / 울지 마라, 아가야”(「어떤 불화」)라고 말하며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여성성―자애로운 어머니상을 수행하기도 한다. 개인의 성(性)이 섹스와 젠더 두 층위로 구성된다는 이론을 채택할 때, 김민정의 화자는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명백한 ‘아가씨’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아가씨가 살아가기에 바람직하고 안전한 곳이 아니다. 2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 때문에 시의 도처에서 여성으로 특정 지어지는 화자는 끊임없이 일상적인 폭력과 맞닥뜨린다.

여성의 신체 그리고 정신은 어디에서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외출한 ‘아가씨’는 소꿉친구의 아저씨가 물려준 벌꿀 사탕을 “입속이 죄다 까지도록”(「죽어도 절대 안 죽는 내 소꿉친구의 아버지는 이제 영원히 노래할 수 없어요」) 빨아야 하며, “졸음이 와서 살짝 벽에 머리를 대고 있”다가 “눈을 떠보니 한 아저씨가 / 치켜뜬 부메랑 같은 눈으로 날 내리찍고 있”(「검은 나나의 제8요일자 일기」)는 얼굴을 마주쳐야 한다. 교실에서는 “남자애들”이 갈겨대는 오줌을 맞고 있거나 선생님에 의해 “젖꼭지를 꼬집어 뜯”긴다. 귀가한 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오늘도 쥐약 먹은 개처럼 날뛰”는 아버지로 인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무릎을 꿇고 싹싹 빌”(「그러나 죽음은 정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어야 하고, 때로는 “아프지 않게 나 좀 살려다오 나는 아무런 죄 없다”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자기연민에 맞서다 끝내는 “이 고얀 년아, 육실헐 년아, 벼락 맞아 뒈질 년아, 이년아, 네가 날 살려야지”(「마지막 설전」)라는 폭언을 견뎌야 한다. ‘아가씨’는 분명 거리에서는 행인, 학교에서는 학생, 집에서는 딸이라는 각기 다른 이름을 부여받았을 테지만, 아가씨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를 ‘아가씨’로만 대한다. ‘아가씨’가 어디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까닭은 단지 그가 ‘아가씨’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아가씨’가 마주하는 일상의 장면들로부터 시적인 눈속임을 걷어내고 나면, 양상 자체는 현실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폭력과 완전히 밀착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민정이 화자에게 과잉되리만큼 뚜렷한 여성성을 부여한 까닭은 시 속 ‘아가씨’와 현실의 여성이 포개지는 곳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의심의 여지 없이 여성인 ‘아가씨’들은 여성으로 패싱(passing)되는 개인이 매일같이 겪는 폭력을 폭로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로 읽을 수 있다. 즉 김민정이 택한 ‘프레임’이라는 시적 전략은 ‘아가씨’와 남성들 사이 위계를 가시화하는 한편, 소수자로서의 여성을 부각함으로써 다성(多性)과 무성(無性)의 범람 속 오롯한 페미니즘적 독해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가 출간되었을 당시의 우리 문단은 ‘서정성’과의 지난한 입씨름 중이었다. 서정의 메커니즘을 배반한 채 전위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들은 ‘미래파’라는 이름으로 묶였고, 2000년대의 문학비평은 그들이 선보인 ‘미래’의 모습을 가늠하기 위해 골몰해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김민정의 화자가 과시하는 ‘여성’으로서의 전략은 희미해지며, 시집이 담지하고 있는 여성주의적 가능성 역시도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채 언어 실험의 일환으로 포섭되었다.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가 관습적 서정으로는 절대 포획할 수 없는, 유쾌하면서도 더없이 파괴적인 진술을 자랑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파격에 취해 그 이면까지 파고들지 못할 경우 시는 “도돌이표 도돌이표로 / 다시 밤마다 𝄇”(「나는 안 닮고 나를 닮은 검은 나나들」) 반복되는 환상적 비극에 갇히게 된다. 벌써 20년 전의 시집을 다시금 호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여기에 있다. 너무 늦게야 알았지만, 그때 그 ‘아가씨’가 바랐던 것은 그 어떤 다른 수식이 아닌, 오롯한 ‘아가씨’로 똑바로 서서 ‘아가씨’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쏟아내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용감한 ‘아가씨’가 잽싸게 선취했던 미래의 프레임을 이제라도 그에게 돌려줄 차례이다.

◇ 가장 사적이고 지극히 보편적인⁷- 이소호의 『캣콜링』

2010년대 이후 ‘프레임’을 둘러싸고 가장 많은 논의가 오갔던 담론장이 있다면 그곳은 단연 페미니즘 진영일 것이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의 불길과 2016년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강남역 살인사건’, ‘#OO_내_성폭력’, ‘#MeToo 운동’을 기점으로 한국사회에서는 미소지니(misogyny)에 대한 대대적인 반성과 함께 유구한 시간 동안 여성에게 씌워졌던 각종 폭력적인 프레임들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우리 문학장 역시 여성-젠더 정체성의 시각으로 텍스트를 읽어내는 한편 여성적 글쓰기 및 여성서사에 주목하며 페미니즘 문학/비평의 외연을 넓히고자 했다. 문단은 그간 한국문학의 구조틀이 되었던 남성중심적이며 관성적인 독해법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페미니즘의 언어를 새로이 세우며 2010년대를 보냈다. 각고의 노력 끝에 페미니즘의 구조 속에서 읽고 쓰기란 짐짓 익숙한 것이 되었다. 이제 한국문학에서의 페미니즘은 모성성이나 타자성에 기대서만 논의되던 그동안의 한계를 넘어 ‘현실과의 접합’을 수행하려 한다고 평해볼 수도 있을 테지만, 확언을 위해서는 그 귀결이 ‘연대’뿐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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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호가 짜둔 프레임 안에서 분명해지는 건
이 사회에서 여성은 모두가 “술래”이자
서로를 슬프게 하는 “쟤”라는 아이러니이다.
가장 사적이고 그래서 지극히 보편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여성들이 처한 필연적인 화해불가능성은 비로소 선명해진다.



연대와 화합은 문제를 갈무리하기에 가장 적합한 진테제인 한편, 어느 담론에나 무리 없이 적용되는 ‘만능 대답’이다. 페미니즘에서도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여성 간의 연대’가 강조되었는데, 2018년 5월 ‘홍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가해 여성이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결집한 편파판결 규탄시위의 메인 슬로건―‘우리는 서로의 용기이다’는 201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행보를 집약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여태껏 서로 연대하며 일궈낸 성취들을 무화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연대는 편리하고 아름다운 미봉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연대는 연대하고자 마음먹은 주체들에게만 유효한 전망이기 때문이다. 연대할 수 없거나 연대를 거부하는 여성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고한 현실의 구조 앞에 연대는 얼마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답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페미니즘 담론과 실천적 움직임이 커져가던 2018년, 『캣콜링』의 출간은 당연스럽게 여겨지면서도 어쩐지 수상쩍다. 이 시집이 당연하게 느껴졌다면 그 까닭은 이소호가 어떠한 오독의 여지도 없이 ‘여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기인했을 테고, 동시에 느껴지던 미시감은 여전히 가부장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연대 대신 불화를 말하는 화자로부터 온 것일 테다. ‘캣콜링’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예고했듯, 이소호의 첫 시집은 현실의 여성들이 마주하는 일상적 폭력―가부장과 가스라이팅, 데이트폭력의 난장에 서 있다. 시인은 사적인 영역에서의 혐오를 말하며 시 속의 폭력을 보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하나 짚어야 할 점이 있다면, 이소호는 ‘전쟁’의 현장에서 섣부르게 낙관하는 대신 현실의 구조를 뒤집어쓰고는 적극적으로 가부장적 가정의 전형―폭력적이며 여성편력이 심한 아버지, 희생하는 어머니나 고통받는 가정 내 여성들을 시에 위치시키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아빠는 모르는 전쟁, 피 흘리지 않는 살해, 죄 없는 살인자다 / 우리는 가족이니까 영원히 / 자식 / 새끼니까 나는 말 없이 / 엉덩이를 까고 온몸으로 / 부성애를 느낀다 가족이니까 말 없이 / 아빠에게 총을 겨누고 / 외친다 // [공공칠] / 빵! - 「나나의 기이한 죽음 ― 페인트와 다양한 오브제」 부분

앞서 이야기했듯, 시 속 자리하는 뚜렷한 프레임은 읽는 이로 하여금 바깥의 현실을 더욱 신랄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기능한다. 「나나의 기이한 죽음 ― 페인트와 다양한 오브제」는 캔버스 안과 밖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부성애’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아빠만 모르는 전쟁”을 전시한다. 이 “무작위의 추상 / 이라고 부르는 구체적 현실”을 매개하는 건 “공 공 칠 빵” 하는 외침이다. 이때 화자의 총구는 “아빠”에게 향해있지만, 게임의 규칙을 떠올려보면 ‘으악’ 하고 비명 지를 사람이 결코 “아빠”는 아님을 손쉽게 알 수 있다. 총을 맞은 사람이 아닌, 그 양 옆의 사람이 손을 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공공칠빵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규칙에 의거한다면 다음번에 총을 쥐고 휘두르는 사람은 “아빠”가 될 게 뻔하다. 즉 가부장의 구조 속에서 화자의 일격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공격권을 다시 가부장에게 넘기는 일만 초래할 뿐이다. 만일 화자로부터 쏘아져 나간 “빵”이 원래의 저격 대상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더라면 이 시의 제목은 “아빠의 기이한 죽음”쯤이 되었어야 할 테지만, “아빠”는 살아남았으며 엉뚱한 이들이 ‘으악’ 하면서 쓰러졌으니 화자는 앞으로 죽은 듯 숨죽인 채 “부성애를 느껴”야 할 것이다.⁸ 그러므로 이 시에는 「나나의 기이한 죽음 ― 페인트와 다양한 오브제」라는 제목이 붙고야 말았다.

한편, 누군가―아마 또 다른 가족 구성원에 의해 ‘으악’하고 울려 퍼진 비명은 『캣콜링』에서 읽어낼 수 있는 여성 간 불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연대’의 이름 아래 자매가 되었던 현실의 여성들과는 달리, 이소호의 시 속 여성들은 당최 화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이 일그러진 모습이다. 『캣콜링』에서 여성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주로 ‘엄마-딸’, ‘언니-여동생’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가정 내에서 “다양한 오브제”로서 존재한다. 장식품 내지는 객체의 위치에 선 이들은 “피 흘리지 않는 살해”의 현장을 보고서도 살인을 고발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은 화자가 “아빠”를 쏘자 ‘으악’ 하고 놀라며, “소리 지르는 사람은 모두 술래”라는 화자의 말에 따라 술래가 된다. 술래와 총을 쥔 사람은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총을 쥔 사람은 사람들을 위협할 수 있지만, 술래가 된 사람의 임무는 공격이 아닌 수색이다. 술래들은 “쟤는 분명 지옥에 갈 거야 / 우릴 슬프게 했으니까”(시인의 말)라고 중얼거리며 감히 가정 내에 분란을 일으키고 애꿎은 가족들을 소리 지르게 한 “쟤”를 찾는다.

엄마는 다리를 혐오했다 /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우리를 //
젖을 빠는 대신 우리는 자궁에 인슐린을 꽂고 매일매일 번갈아 가며 엄마 다리 사이에 사정을 했다 / 그때마다 개미가 들끓었다 // (중략)
이제 / 가족을 말하지 않고 나를 말하는 방법은 / 핑계뿐이다 //
“엄마는 늘 내게 욕을 했어요 / 애미 잡아먹는 거미 같은 년이라고”* // (중략)

* 벨벳 거미는 자살적 모성 보호가 있는 곤충으로, 산란 후 어미가 자식들에게 자기 몸을 먹이로 내어 준다. 이는 모성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그리고 그 극단적 모성은 숙명이다. 자식의 미래는 어미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는 이것에 관한 다큐를 보고 엄마에게 욕을 하셨다. “거미 같은 년”이라고. 나는 그날을 기억한다. 엄마는 아이처럼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서럽게 울었다. - 「경진이네 ― 거미집」 부분

이제 이소호는 술래가 “쟤”를 찾아내는 내용의 연극을 기획한다. 『캣콜링』에서의 프레임은 레이코프가 부여한 언어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본연의 뜻―액자 혹은 장면으로도 유효한데, 시인이 미술과 연극의 메커니즘을 경유하며 시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⁹ 『캣콜링』에 수록된 여러 시 속에서 시적 화자 “경진”과 그의 가족―엄마와 아빠, 여동생 “시진”은 연극의 등장인물로 각자 맡은 바를 수행하며 프레임을 주조(鑄造)해나간다. 네 명의 가족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경진이네”는 가부장의 논리와 위계에 착실한 보통의 가정이다. “우린 아빠 갈비에서 태어났”기에 “아빠는 하늘 우리는 땅 하늘 땅 별 땅”(「엄마를 가랑이 사이에 달고」)이다. 공고한 ‘남존여비’의 프레임 안에서 “경진”과 가족들이 벌이는 연극은 일차적으로 남성-여성 간 숨 쉬듯 일어나는 폭력을 폭로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엄마”와 “우리”, “경진”과 “시진”은 맡은바 충실하게 서로를 사랑하며, 또 미워하며 가정 내 여성들 사이 비가시적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의 양상까지를 그려낸다.

「경진이네 ― 거미집」의 부제에 주목해보자. “거미집”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부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미 같은 년”이 함의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해당 구절에 붙은 각주는 벨벳 거미의 습성을 설명하고 있다.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자살한다는 벨벳 거미는 희생적 어머니상을 연상하게끔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다만, 새끼에게 먹힌 벨벳 거미는 새끼를 원망할 틈도 없이 이내 숨을 거두므로 벨벳 거미의 희생에는 뒤끝이 없다. 그러나 엄마-딸의 관계에서 어머니의 희생은 마치 지독한 악취가 풍기는 거름처럼 남아 엄마와 딸이 온 생에 걸쳐 서로를 미워하도록, 그러나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도록 한다. 「경진이네 ― 거미집」에서 “우리”는 엄마의 “자궁에 인슐린을 꽂고 매일매일 번갈아가며” 엄마에게 모욕을 준다. 그때마다 엄마는 몸에 개미떼가 들끓는 듯한 불쾌감을 참으면서도 차마 “우리”를 미워할 수 없어 “다리를 혐오”하지만, 사실 엄마의 원망이 향하는 곳은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우리”임을 엄마도, 화자도 너무나도 잘 안다.

“경진이네” 여성들이 그러하듯, 가부장의 구조 속에서 (여성) 양육자와 (여성) 피양육자는 모두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위치에 서 있다. “자식의 미래는 어미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희생이 한 여성을 자라게 하고, 다 자란 여성은 다시금 희생하는 여성이 되어버리는 “극단적 모성”의 굴레는 유구하게 이어지며 “죽음의 추상”을 반복한다. “애미 잡아먹는 거미같은 년”이라는 중얼거림의 대상이 엄마를 “뜯어 먹”는 “우리”인지, 아니면 할머니를 “뜯어 먹”었을 엄마인지는 끝내 모호해진다. “빗방울에도 쉽게 부서지는 집” 안에서 엄마와 딸은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갉아먹으며 죽지도 않는 벨벳 거미가 된다.

마스카라로 서로의 음모를 빗었다 // 다리에 드리운 밤의 가지는 점점 길어졌다 // 보푸라기처럼 닿으면 닿을수록 망가지는 우리 // 언제나처럼 // 사랑한다는 말만 남고 우리는 없었다 - 「별거」 전문

연극 속 “경진”과 “엄마”가 세대를 타고 이어지는 모성의 전복을 상징한다면, “경진”과 “시진”의 뒤틀린 자매애는 끝끝내 연대할 수 없는 여성들의 서글픈 이해관계를 닮았다. 1부 “경진이네”의 처음과 끝에 「동거」와 「별거」라는 제목의 두 시가 놓인 것은 어딘가 의미심장하다. 「동거」에서 “언니”와 “동생”이라는 구체적 호칭으로 나타나던 두 사람은 「별거」에서 “우리”라는 불분명한 지칭으로 묶인 채 사라진다. 두 사람이 자리했던 곳에는 “사랑한다는 말만” 남아있을 뿐이다.

아름답게 사라진 자매의 모습은 낭만화된 여성 연대의 말로를 보는 듯하다. 여성들은 연대의 이름으로 투쟁했고, 실패하기도 때로는 이뤄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결집은 ‘영영 페미니스트’들이 선보인 짜릿한 성취이다. 그러나 급진적인 페미니즘의 물결은 여성을 ‘각성한 자’와 ‘각성하지 못한 자’로 갈랐고, 이후에도 여성들은 ‘코르셋’과 ‘백래쉬’, ‘래디컬’ 등의 무수한 잣대로 서로를 겨루며 끊임없이 편 가르기 했다. 함께함을 거부하는 여성, 혹은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여성 앞에서 연대는 너무나도 무력하다. 불가해(不可解)의 현실과 서로를 탓하는 마음을 모른 체하며 외치는 연대란 허울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와 ‘나’의 합집합이어야 마땅하지만, 보기 좋도록 얼기설기 봉합된 “우리” 안에 더 이상 “언니”와 “동생”, 두 사람은 없다. “아무도 우리였던 우리를 기억하지 못했다”(「시진이네 ― 죽은 돌의 집」).

이소호가 짜둔 프레임 안에서 분명해지는 건 이 사회에서 여성은 모두가 “술래”이자 서로를 슬프게 하는 “쟤”라는 아이러니이다. 가장 사적이고 그래서 지극히 보편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여성들이 처한 필연적인 화해불가능성은 비로소 선명해진다. 모성성 그리고 타자성은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내던져야 할 여성 서사의 전형적 프레임이라고 여겨졌지만, 현실의 여성으로부터 그 둘을 떼내기란 불가능하다. 잘못된 채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일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는 이유는 결코 그 일이 잘못되었음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이소호는 액자를 통해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분리되지 못한 채 계속 이어지는 술래잡기를 전시한다. 액자 속 “경진”과 그의 가족들은 피투성이의 몸으로 껴안은 채 다정하게 말한다. “우린이세상누구보다제일가까운사이잖아너생각하는건나뿐이야잊지마”(「오빠는 그런 여자가 좋더라」).

◇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¹⁰ - 권박의 『이해할 차례이다』

“메리 셸리와 이상이 시의 몸으로 만났다”는 추천사는, 권박의 첫 시집 『이해할 차례이다』를 적확하게 함축한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실험으로 탄생해버린 크리처와 같이, 좋을 대로 얽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권박 시의 이미지들은 이상(李箱)의 시처럼 난해하며 또한 히스테릭하기 때문이다. 신경질적인 성격과 병증을 뜻하는 히스테리의 어원은 자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인 ‘히스테라(hyster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¹¹ 시어들 간의 논리 구조나 선후 관계, 일체의 인과를 알 수 없이 결합하는 권박의 언어는 그간 ‘여성의 것’이라고 여겨졌던 신경질을 닮아있는 듯 보인다. 발랄한 어조로 “예뻐지고 싶어!”(「도벽」)라고 외치다가도 한순간 표정을 바꾸어 “죽고 싶어”(「공동체」)라고 말하는 화자의 히스테리함을 어떻게 감당하면 좋을까. 『이해할 차례이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서술들 속 산발적으로 흩어진 ‘나’의 잔해를 찾아 화자가 설명하는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여성조차 자신의 ‘여성’을 검열하며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이 시대에,
명백한 여성의 목소리는 가끔 “몽유병자”의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혼란스럽고 어지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여성들의 발화(發話)로부터
발화(發火)하는 불꽃은,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타오른다.


점괘로 말하면 나는 독사에게 물려도 죽지 않는 돼지.
추리소설식으로 말하면 나는 살인자의 망치 혹은 독살자의 컵.
인간적으로 말하면 나는 필라델피아 주변을 돌고 돌다가 디트로이트에서 모피를 밀수하는 프랑스인. - 「필요한 건 현실이다 말하는 너에게 허구로 만들어버리는 나의 입으로부터」 부분

화자는 스스로를 “독사에게 물려도 죽지 않는 돼지”이며 “살인자의 망치 혹은 독살자의 컵”, “필라델피아 주변을 돌고 돌다가 디트로이트에서 모피를 밀수하는 프랑스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알쏭달쏭한 수수께끼처럼 제시된 이미지들이지만, 나름의 규칙이 존재한다. 돼지의 두터운 지방층은 독사의 독이 혈관까지 침투하지 못하게 하므로 독사의 독은 돼지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돼지의 앞에서 사실상 독성을 잃어버린 뱀은 도리어 잡식성인 돼지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처하며, 이러한 관계 속 둘 사이 먹이사슬이 전복된다. 한편 “망치”와 “컵”은 “살인자”와 “독살자”의 수중에서 단순한 사물이 아닌 살해 도구가 되며, 앙투안 드 라모트 카디약을 필두로 한 프랑스인들은 디트로이트 지방에 모피를 밀수하기 위한 목적의 요새를 세우며 지역의 원주민들을 쫓아낸 전적이 있다. 다시 말해 “돼지”와 “망치”, “컵”과 “프랑스인”은 모두 무해하다고 여겨지지만, 특수한 맥락을 매개로 하여 상황을 장악한다는 점에서 같다.

“(죽지 않는 돼지) (살인자의 망치/독살자의 컵) (밀수하는 프랑스인)인 나” 역시도 의중을 숨긴 채 시의 가장자리에 잠복해있다. 『이해할 차례이다』에는 여성의 신체 혹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경험하는 폭력의 양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권박은 특징적일 만큼 길고도 많은 양의 각주를 일종의 틀로서 사용하여 시를 그 안에 가둠으로써 페미니즘적 독해를 유도한다.¹²

각주는 대개 글의 주변부에서 부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권박은 중심과 주변의 위계를 뒤집으며 변두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주목하도록 한다. 이러한 전복 속에서 자칫 사실에 구애받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기 쉬운 시에서의 각주는 “내게 필요”했던 “허구라는 입”이 되어 허구인 척 현실을 전시하는 시적 전략으로 기능할 수 있다.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앵무새를 키웠다. 앵무새가 나의 얼굴에 부리를 그었다. 총을 쐈다. 앵무새처럼 밝음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저, 태양에게. 다량의 수면제를 먹였다. 코뿔소처럼 밝음을 전투적으로 보여주는 저, 태양에게. 또, 실망이 나팔꽃 줄기처럼 뻗어 나간다. 이번에는, 눈물이 레몬처럼 달고 얼음처럼 따뜻하다. 내가 되기 위해 나를 따라했던 나는, 줄줄…… 잠시만요, 찬장에, 찬장에서…… 쌓아 놓았던 썩은 양파 같은…… 눈물이 깎은 손톱처럼…… 이를 어쩌나? 어떻게 해도 말끔하게 청소되지 않는 슬픔이 기진맥진한 채 찬장 안쪽에 있는 포름알데히드 병을 꺼낸다. 잿빛으로 질질 떠다니는 살점이다. 실패의 모습이다. 코를 찌르는 본능이다. 정전이 되었던 신경이다. 내가 가장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오늘이 컷, 되어도 오늘인 이유를 물어보는 건 실패에게 “왜 충실하지 못했니?” 물어보는 것과 같지 않나? - 「리스트 컷(wrist cut) ― 죽음에 대해 알아 갈수록 죽음과 나와의 거리를 직시하게 될 것」 부분

이제 궁금한 것은 권박이 각주라는, ‘시적인 것’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글쓰기 방식을 자신의 전략으로 채택해야만 했던 까닭이다. 권박 시의 화자에게서는 사뭇 상반된 듯 보이는 두 개의 자아가 발견된다. 순진한 혹은 불순한 말투로 아리송한 이미지들을 연쇄하는 이는 주로 본문에 위치하며, 객관적이며 차분한 어조로 일목요연하게 말하는 이는 각주에 자리한다. 둘 중 여성으로서의 ‘나’를 호소하며 “나에 대해 말”하는, 즉 진짜 ‘나’에 가까운 자아는 후자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혐오적인 사회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 셸리(들)”(「마구마구 피뢰침」)의 목소리와 그로부터 발화되는 말들은 너무나도 미약하다. 그러므로 권박은 시 속에 한 마리의 “앵무새”를 풀어놓는다. “앵무새”는 도통 이해할 수 없게 말하거나 죽음 충동의 이미지를 연쇄함으로써 자신을 위장한 채 ‘미친 여자’인 것처럼 연기한다. “앵무새”의 방식을 통해 ‘나’는 “나의 얼굴에 부리를” 그을 수 있게 된다. 화자는 비로소 “허구라는 입”을 통해 말하고, “태양”으로 상징되는 세계의 헤게모니를 겨냥한다.

다수의 이항대립 속에서 여성은 대개 더 열등하다고 믿어지는 편에 위치하게 된다.¹³ 권박은 그간 여성이 점해야 했던 열등함―히스테리, 횡설수설, 비논리를 자신의 “철창”이자(「알코올」) 요새로 삼은 채 여성적 글쓰기를 전개한다. “내가 되기 위해 나를 따라”하고 나를 꾸며내야 하는 아이러니는 일순 ‘나’의 입지를 흐트러뜨리는 듯 보이지만, 사실 ‘나’는 ‘나’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 없다. 수많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 셸리(들)”은 심지어 자신의 “신경”을 “정전”시키는 죽음의 방식을 불사하면서까지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고투해왔다. ‘리스트컷(wrist cut)’이라는 시의 제목으로부터 그들의 손목에 가득한 자해흔을 상상해볼 수 있지만, 그들은 “죽음에 대해 알아 갈수록”,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해 말하며 자신을 위장할수록 되레 “죽음과 나와의 거리를 직시”하며 더없이 또렷해진다. “찬장에”도, 변두리에도 여성들은 “실패의 모습”으로 묻고 또 물으며 자신의 “최선을 다”해 “오늘”, 여기에 존재한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한” 여자들이다. 그렇기에 “똑똑한” 여성들이다.

◇ 불꽃에서 태어나는

김민정과 이소호, 권박은 각자의 프레임을 통해 다분히 ‘여성적’인 범주에서의 여성에 대해 말한다. 분명한 건, 이제 더는 이 여성들의 출현이 놀랍게 느껴지지 않으며 앞으로 더욱 더 많은 여성들이 각기 다른 ‘여성’의 모습을 한 채 지금, 여기로 모여들 것이라는 점이다. 수치도 망설임도 없이, 그저 긍지로 고양된 얼굴을 하고서.

의식이 깨어나는 시대에 산다는 건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동시에 혼란스럽고 어지럽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이 죽은 자들 혹은 잠자는 의식이 깨어나 이미 수백만 여성의 삶에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중략)

몽유병자들이 깨어나고 있고, 이 깨어남은 처음으로 집단적인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즉, 이제 눈을 뜨는 게 더는 외로운 일이 아니다.¹⁴

여성조차 자신의 ‘여성’을 검열하며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이 시대에, 명백한 여성의 목소리는 가끔 “몽유병자”의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혼란스럽고 어지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여성들의 발화(發話)로부터 발화(發火)하는 불꽃은,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타오른다. 불꽃 너머에서 마녀의 형상이 점차 선명해진다. 이제 눈을 뜨고, 절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이 시대를 불사를 마녀들의 밤을 지켜볼 차례이다.

■ 각주

1. 이 글은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이소호의 『캣콜링』(민음사, 2018), 권박의 『이해할 차례이다』(민음사, 2019)를 대상 텍스트로 한다.
2. 조지 레이코프, 『프레임 전쟁』, 나익주 옮김, 창비, 2007.
3. ‘무성적 화자’의 출현이 특히 두드러지는 2000년대 중반의 시집으로는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문학과지성사, 2005)가 꼽힌다.
4. 「미지×희지 Vol. 1: 쩌는 세계―이자혜·황인찬,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인터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6년 가을호.
5, 6. 양경언, 「최근시에 나타난 젠더 ‘하기(doing)’와 ‘허물기(undoing)’에 대하여」, 『문학동네』 2017년 여름호.
7. 다음의 기사 내용을 참고하였다. 김수영문학상 이소호 “일상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2018.12.27.). 연합뉴스.
8. 『캣콜링』 속 등장하는 가족이 ‘아빠’와 ‘엄마’, 화자인 ‘경진’과 자매 ‘시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고려한다면 「나나의 기이한 죽음 ― 페인트와 다양한 오브제」에서 ‘아빠’ 대신 쓰러진 다른 두 인물은 ‘엄마’와 ‘시진’, 즉 가정 내 여성임을 알 수 있다.
9. 『캣콜링』의 4부에 붙은 제목 ‘경진 현대 미술관(Kyoungjin Museum of Modern Art)’은 시인이 전시의 방식을 경유하고 있음을 알린다. 이소호는 두 번째 시집 『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현대문학, 2021)와 세 번째 시집 『홈 스위트 홈』(문학과지성사, 2023)에서도 마찬가지의 전략을 사용하며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한다.
10.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동아시아, 2021)의 제목을 차용했다.
11. 성(性)적으로 만족되지 못한 자궁이 몸속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부딪히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진다는 논리 아래에서 신경증은 고대부터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여성만의 질병으로 사유되었다. 각주의 내용은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동아시아, 2021)을 참조하였다.
12. 『이해할 차례이다』의 시편들에 달린 각주는 대개 사실에 기반해있다. 각주를 특징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시로는 「마구마구 피뢰침」, 「예쁘니?」, 「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 등이 있다.
1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박혜영 역, 동문선, 2004.
14.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 9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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