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 인터뷰
대한민국발레축제 예술감독 된 발레리나 김주원
무용수일땐 내 생각만 했는데
객석서 준비한 공연 보게되니
스태프들 노고 느끼며 반성도
타인을 알고 인정하기 전에
나부터 들여다보고 이해해야
좋은 공연은 관객을 생각하고
소통하며 영감 전달할때 가능
발레리나 김주원은 서울 성동구의 한 작은 카페에서 만나자며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약속보다 30분 이르게 도착했는데, 이미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 있던 김주원이 보였다. 주인 한 명이 테이블을 다섯 개만 두고 운영하는 곳이었다. 자주 오는 곳인지 묻자 김주원은 “조용히 시간 보내고 싶을 때 종종 들릅니다”라며 웃었다. 괜히 미리 와서 그 시간을 방해한 것 같다는 말에 김주원은 “전혀”라며 손사래를 쳤다. 매니저나 소속사 직원 없이 혼자 온 그는, 혹시 질문지를 짠다든지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면 자신은 다른 테이블에서 기다리겠다는 배려까지 덧붙였다. 질문을 굳이 먼저 만들어둘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안히 대화하듯 인터뷰를 곧장 시작했다. 예술감독 활동을 병행한 지 12년째 접어든 발레리나 입에서 먼저 나온 단어는 ‘시선’이었다.
“지금은 무대 아래에 내려와 있는 거죠. 그래서 저의 시선도 달라져 있어요.”
김주원은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1998년 한국 국립발레단에 수석무용수로 입단해 15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 2006년에는 세계 최고 권위의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에서 최고 여성무용수 부문을 수상했다. 2000년대 한국 발레의 부흥기를 이끌었고, 2013년 4월 ‘마그리트와 아르망’부터 지난해 11월 ‘샤이닝 웨이브’ 공연까지, 그 자신이 직접 만든 수많은 무대에 오르며 홀로서기에도 성공했다. 고향인 부산시에서 ‘부산 오페라하우스 발레단’ 예술감독도 맡은 그는, 올해 15주년을 맞이한 ‘대한민국발레축제’의 대표 겸 예술감독으로도 위촉됐다. 1950∼1960년대생 위주였던 발레계 주요 단체의 수장이 1970년대생으로 넘어가는 세대교체를 알린 장면이다. 그 파도의 맨 앞에 서 있는 김주원의 ‘시선’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발레리나, 예술감독 서로의 시선은 어떻게 다를까요.
“저는 미친 듯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삶을 오랫동안 살았어요. 모든 일정을, 심지어 욕조에 들어가는 타이밍까지 그날의 근육 상태와 공연을 하는 일정에 맞춘…. 요즘에는 저도 제 안에 있는 줄 몰랐던 열망을 느끼는데 예를 들면, 무대 위에 있는 후배들에게 더 좋은 무대, 더욱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거예요.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삶을 살았던 제가, 이제는 다른 무용수 그러니까 후배들이 좋은 변화를 이뤄내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더라고요.”
―그 이면에는 만만치 않은 현실적 문제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국립발레단에서 나오고 나서는 1인 100역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예산만 봐도, 그 돈을 어떻게 나눠 써야 하는지 그림을 착 그리는 사람이 됐죠(웃음). 객석 수에 맞춰 창출할 수 있는 수익, 출연료 배분이라든가 공연에 앞서 어떤 회의가 필요하고 단계마다 어떤 세팅이 필요한지 등등. 내가 이제 예술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고요(웃음). 알고 싶지 않던 것들도 알게 되고…. 많이 울기도 했죠. 춤출 때는 제가 제 몸을 움직이면서 집중하니까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만, 무대 자체를 제 뜻대로 움직이는 데는 어려운 점들이 훨씬 더 많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들이 가장 친한 말이 됐죠. 무용수 시절에는 참 교만했다는 생각이 든 게, 그때 감독님들과 발레단 스태프들의 노고를 헤아리지 못했다는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객석에서 공연을 마음 편히 즐기기도 어렵겠습니다.
“무용수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심장이 덜컹하고(웃음), 조명이나 구도가 안 맞으면 정말 소리 지르기 직전까지도 가고요…. 객석 중 제일 뒤편에 앉아 있다 보면 심장마비가 몇 번은 올 것 같지만, 관객들께서 박수를 많이 쳐주시면 그게 너무 감사해서 제가 제일 크게 박수를 치고 있더라고요(웃음). 무용수 시절에는 제 춤을 불사르기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그렇지가 않네요.”

―좋은 공연이란 어떤 공연인지 생각도 달라졌겠습니다.
“무조건 관객과 소통해야 해요. 예술가의 자위행위가 아니라, 예술가 자신보다 관객을 더 생각하는 작품이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작품 형식이 추상적이든, 현실적이든 공연 그 자체가 어떤 형태로든 전달돼야 하는 것이 저는 옳다고 봐요. 거기서부터 작품 고민이 시작되기도 하고요. 소통하지 않을 거면, 객석 앞이 아니라 혼자 공연하면 되지 않을까요?”
김주원이 단호하게 강조한 ‘소통’의 의미는 무대 현장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매일 첫 일정이 시작되는 시간보다 서너 시간은 빨리 일어나는 그가 아침 운동을 하면서 듣는 것은, 방송·라디오 뉴스다. 그의 ‘예술관’과도 연관성이 있는 습관이다.
―무용수는 연습실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지만, 그 바깥의 세상으로 귀는 열어둔다는 뜻일까요.
“예술가는 사회의 변화에 앞서 무언가를 제시하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해요. 감각을 다루는 면에서 조금은 더 많이 열려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먼저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의 소리가 들린다고 표현할까요. 그래서 예술가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좋은 예술로서, 이 사회에서 좋은 일원이 되는 예술가로 남고 싶어요.”
―요즘의 우리 사회에 대해서는 어떤 것을 보고 듣고 계십니까.
“소통의 부재, 서로에게 유연하지 못한 태도들, 서로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경직성이 느껴져요. 그 사이사이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각자도생 세상에서는 모두가 힘들어지잖아요. 저는 ‘모두가 잘 돼야 나도 잘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 우리 세상에는 서로에 대한 미움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경직돼 있는 것들을 예술로 부드럽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해 왔어요.”
김주원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 근육’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 타인을 섣불리 재단하거나 규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하는 데는 감정상의 체력이 많이 들기 마련이다. 그 체력을 단련하면서 ‘감정 근육’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냈다. 김주원은 이 생각을 담은 저서 ‘나와 마주하는 일’을 지난달 출간했다. 부제는 ‘완벽하지 못한 내 몸을 사랑한다’. 자신의 몸을 마주하고 단련하며 성장한 내면 이야기를 풀었다.
―감정 근육은 예술을 통해 단련될 수도 있는 걸까요.
“자신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충분히 이해한 후에야, 타인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어떤 글, 그림, 몸짓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고 애쓰면서요. 자신을 간단하게 이해하는 것부터가 예술이죠. 저는 어릴 적 매일 거울을 보며 발레 기준에 맞는 몸 선을 생각했어요. 몸이 너무 보기 싫었던 때도 있었고, 욕심이 너무 많아 보이거나 흉측하게 보일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 긴 시간을 겪으면서 지금은 자신을 조금은 더 사랑하게 됐고요. 제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저밖에 못하잖아요. 이 생각을 하고 나서야 다른 이들의 표현, 철학도 인정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정치인들에게도, 발레를 가르쳐야 하는 건지 생각도 해봤네요(웃음).”
―다른 이에 대한 이해, 소통으로 이어지는 그 예술관의 형성은 언제 시작된 걸까요.
“19세에 국립발레단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졌죠. ‘지젤’이라는 공연을 무료로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했습니다. 그때 아이 셋을 혼자 키우는 한 여성이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너무 많이 울었다고요. 남편마저 도망갔고, 자신은 이제 죽어야 할지 매일 고민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무료 공연을 보여주자고 오셨던 분입니다.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지젤’이 그분에게 힘이 됐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많이 어렸던 제게는 기쁘다기보다 충격의 느낌이 더 컸고, 무섭기도 했어요.”
김주원은 잠시 목멘 목소리로 이 이야기를 돌이켰다. 어린 시절 몸이 약했던 그는 ‘살기 위해’ 발레를 시작했다. 모든 자극에 예민했던 김주원은 작은 소리만 들려도 잠들지 못했고, 음식물을 삼키는 것도 불편해 메추리알만 먹으며 지낸 적도 있다. 자기 생존을 위한 발레가, 다른 누군가에게도 삶을 이어갈 힘이 된다는 사실을 접한 것은 뿌듯함에 앞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김주원은 그때의 그 강렬한 느낌을 잊지 않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다듬어 왔다. 지금은 예술의 소통력을 강조하는 말과 행동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가 교육부 ‘늘봄학교’,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꿈의 무용단’ 등 공공교육 사업에 참여해 왔던 이유다.
―온·오프라인으로 예술교육 활동도 꾸준히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저를 보면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해요. 서로 이름 얘기하는 것도 쑥스러워하고요. 그런데 같이 땀 흘리고 춤을 추다 보면, 점점 어깨를 펴기 시작하고 뚜렷하게 자기 의견을 말해요. 저를 사랑해주는 게 느껴지기도 한답니다. 꿈이 없다고 한 아이들도 저하고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면, 수십 가지씩 꿈 얘기를 하기도 하고요. 아이들이 꿈을 꾸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 아닐까요.”
―실감하시겠지만, 무용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고 스마트폰으로도 많이 찾고요. 무용 예술이 영상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요.
“이제 스마트폰으로 다 해결되는 시대잖아요. 세계에서 어떤 공연이 올라가는지 이걸로 다 볼 수 있고, 저도 스마트폰으로 다른 나라의 공연들을 많이 찾아봅니다. 순수 예술을 하는 이들에게는 스마트폰 영상이 너무 짧은 호흡의 빠른 형식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따라갈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존 무용의 느린 미학도 중요합니다. 다만 새로운 문법에 적응하고 나서야, 이제 무용에 어떤 힘이 필요한지도 보이지 않을까요.”
■ 김주원은
△1977년 부산광역시 출생 △선화예술중학교 무용부 발레·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1998∼2012) △서울사이버대학교 부학장(2023~현재)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2012∼2023) △부산 오페라하우스 발레단 예술감독(2024∼현재) △대한민국발레축제 대표 겸 예술감독(2024∼현재)
서종민 기자 rashomon@munhwa.com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