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홍 동국대 행정대학원 안보북한학과 교수

어렵게 성취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국가의 품격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12·3 비상계엄의 후폭풍이 계속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판단과 당국의 수사를 지켜봐야겠지만, 이번 사태는 여러 측면에서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것이다. 그중 하나가 국가정보기관의 역할이다.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 문제다. 비상계엄 과정에서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가 대통령으로부터 정치인 체포에 정보력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국정원이 부인하고 있어 수사를 통해 진실 여부가 밝혀지겠지만,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충격이다.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역사는 정권과 정치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민주화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대통령들은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 금지를 약속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국정원법 개정(2020.12)을 통해 아예 국내정보 수집 기능을 폐지하고 정치 관여 처벌 규정을 강화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초대 국정원장에게 “국내정치에 절대 관여하지 말 것”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2022. 5.26, 청문회) 따라서 계엄 과정에서 정치인 체포 시도에 국정원 이름이 오르내린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스라엘 초대 국가원수 다비드 벤구리온은 정부 내에서 모사드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했고, 이 원칙은 수십 년간 불문율로 지켜졌다. 정보기관을 보호하겠다는 통치권자의 확고한 의지와 치밀한 관리가 있었기에 오늘날 모사드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버금가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국정원의 선거관리위원회 보안 점검 문제다. 이는 ‘정보의 정치화’와 관련이 있다. 부정선거는 12·3 비상계엄의 핵심 명분 가운데 하나였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계엄 선포 이유로 “부정선거 의혹 규명”을 강조했다. 윤 대통령도 지난해 12월 12일 대국민 담화에서 선관위의 보안 시스템 문제점을 지적하며 “국정원의 보고를 받고 충격에 빠졌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선관위 보안 시스템이 취약하다고 판단했을 뿐, 부정선거 단서는 포착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국정원의 설명대로라면 보안 점검 결과 보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보기관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정보의 분석과 판단에 정치적 고려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이는 ‘정보실패(intelligence failure)’로 이어지게 되고, 막대한 국력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량파괴무기(WMD) 존재와 관련한 2002년 CIA 보고서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로 인해 미국의 국격은 추락했고 어렵게 쌓아 온 CIA의 신뢰도 무너졌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정세는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오는 20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다. 김정은은 새해 벽두부터 극초음속 탄도 미사일 도발을 자행했고, 전쟁 위협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정국은 계엄과 탄핵의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방을 책임지는 군은 국방장관과 핵심 부서 수장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그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 국가안보의 최전선에 있는 국정원의 역할이 막중하다. 확고한 정치적 중립을 바탕으로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데 가용 정보자산과 역량을 쏟아부어야 한다. 치열한 글로벌 정보전에서 국익 극대화를 위한 정보 수집에 박차를 가하면서 북한 동향을 감시·추적하고 선제 대응할 수 있는 예방 정보 활동도 대폭 강화해야 한다.

김호홍 동국대 행정대학원 안보북한학과 교수
김호홍 동국대 행정대학원 안보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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