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아리셀 화재 사고와 서울시청역 참사 수습이 마무리돼 가던 지난해 여름. 유족들 트라우마를 치료하던 전문가는 어렵사리 만난 자리에서 ‘가짜 안전’이란 단어를 꺼냈다. 대다수 사람은 자신이 조심하니깐 안전하고, 비극은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선을 긋는다. 이 같은 생각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세월호와 핼러윈 참사 등 숱한 재난 현장을 다녔던 그가 유족과 피해자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였다고 한다. 재난은 부자나 유명인사, 권력자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는다. 장소를 가리지도 않는다. 나만 잘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사고도 아니다.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도 마찬가지였다. ‘재난은 랜덤’이란 냉정한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시 큰 트라우마를 안게 됐다. 비행기란 일상적 공간에서 벌어진 참사는 슬픔의 진폭을 키웠다. 재난의 그림자는 짙다. 장례 절차는 끝났지만, 유족과 국민이 겪어내야 할 트라우마는 이제 시작됐다. 재난은 우리 사회 밑바닥을 확인하게끔 한다. 참사 현장에선 여러 가치관이 충돌한다. 정치화된 재난은 갈등과 반목을 낳았다. 이번 참사에서도 비난과 혐오 발언은 등장했다. 희생자를 위한 애도를 강요할 수 없듯이 참혹한 죽음을 조롱거리로 삼아서도 안 될 일이다. 재난 앞에서 모든 이들이 가진 조건값은 평등하다.
재난은 선진국에서도 일어난다. 한 나라의 역량은 참사 후 대응에서 드러난다. 재난 대응이 매번 완벽할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재난을 겪은 이들을 보살피고, 실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 시스템을 바꾸는 노력을 할 때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희생자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기도 하다.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 참사는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트라우마 회복은 참사를 수용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한다.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은 사실도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운데 사고 원인마저 납득되지 않을 경우 유족들에겐 지옥 같은 현실만 남게 된다. 진상 조사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돼 유족들이 수긍하면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트라우마가 치유되는 데도 도움될 수 있다.
우리가 누리는 안전은 수많은 사람의 피로 일궈졌다. 재난은 무책임과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재난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순 없지만, 재난을 어떻게 수습할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때로는 불편한 감정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분노는 사회의 부조리를 고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불안은 우리를 보호해준다. 불안하기에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면서 코로나19 확산을 막아냈다. 당시에도 국민이 연대하는 힘이 공동체를 지켰다. 재난과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없다. 개인의 힘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재난이 터지면 가장 약자는 유족과 피해자다. 온 세상이 무너진 이들을 보듬는 건 우리가 서로를 지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트라우마를 이기는 힘은 결국 사회적 지지와 연대에서 나와서다. 약자를 지지하고 돕는 사회는 트라우마에 강하다. 공동체도 성숙해진다. 이때 우리는 ‘진짜’ 안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