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60여 개국의 기업이 참가한 가운데 지난 7일 개막돼 10일까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계속된 IT·가전 전시회 ‘CES 2025’는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성황을 이뤘다. 우리나라는 이번에 1000여 기업이 참가해 CES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온 위상을 지켰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팽창이 CES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다고 할 순 없다. ‘소비자 가전 박람회’로 1967년 시작된 이 유서 깊은 행사를 이제는 가전·인공지능(AI) 박람회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전시된 거의 모든 것이 AI 기술과의 접목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은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가전이라는 제한을 뛰어넘어 통신·바이오·차량·농업·우주 등 CES가 다루는 기술 분야의 범위는 크게 넓어진 게 맞다. 하지만 분야만 다양할 뿐 그 안에 들어 있는 원천기술은 오히려 획일화한 것처럼 보인다. AI 기술이 확산됐다는 말은 점잖은 표현일 뿐,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심층 신경망, 트랜스포머, 파운데이션 모델 등 이 시대를 이끄는 진정성 있는 연구자들이 개발한 소수의 AI 원천기술이 모든 분야를 잠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CES는 일부 원천기술에 대한 끝없는 변주로 볼 수 있다. 이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가 IT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일찌감치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변형 대부분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하드웨어와 달리 소프트웨어부문에서는 결정적인 변형, 철학적인 변형만이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변형하고 최적화해서 제품에 적용하더라도 본질이 같다면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소프트웨어 분야의 전통이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AI 기술에 대해서도 이는 그대로 적용된다. 소프트웨어 원천기술 없이 제조업에 머물러 있는 기업들에는 재앙과 같은 규범이다. 일반적으로 무한한 변주는 자연 선택 과정을 거쳐 진화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는 본질에 대한 변주가 이뤄졌을 때만 성립한다. AI 기술은 CES 입장에서 보면 외생적이다. CES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변주가 AI 기술의 진화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AI 분야 원천기술 전반에 걸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엔비디아(NVIDIA)가 이번 CES에서 보여준 무게감은 과장을 보태자면 다른 참여 기업 전체를 합한 것 이상으로 보일 지경이다. 가전이나 로봇 어느 하나도 직접 만들지 않는 엔비디아의 포트폴리오를 생각하면, 주객은 어느새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AI를 포함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대한민국이 입지를 갖추려면 전체 시스템의 일부 핵심 부품 생산에 만족하는 제조업 마인드를 혁신해야 한다. 일반인공지능(AGI) 실현과 같은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AI 원천기술 분야에서 처절하게 경쟁해야 한다. AI 소프트웨어에는 전통적인 하드웨어 시대에 널리 통용되던 공급망 역할 분담과 같은 개념이 없다. 온전한 승자독식이며, 살아남은 AI 기술이 무한히 변형될 뿐이다.
AI를 온전한 시스템이 아니라, 부품 차원에서 바라보는 정책과 규제를 국가적으로 시급히 재정비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음을 이번 CES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