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서재

책을 열었더니 “두려워 마세요(be not afraid)” 한다. 책을 닫으려니 “꼭 버티세요(hold on)” 한다. 작금의 우리로 보건대 콕 집어 누구 한 사람에게만 주기 싫은 메시지, 오늘의 나로 보건대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 왜냐, 가질 수 없는 지난해가 불을 딱 껐으니까. 하여, 가질 수 있는 모든 새해가 불을 탁 켰으니까. 뭐니 뭐니 해도 ‘시작’처럼 밝은 등불은 없으니까 그 아래 어디쯤 의자 하나 놓고 이 책을 안았을 적에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체념 아닌 무념이다. 쉽고도 어렵구나. 이 책 이거 ‘인생’ 맞겠구나.

세계적인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마이라 칼만이 쓰고 그린 책이다. 아름다운 이 책을 우리 손에 아주 친근하게 자주 빈번하게 들게 한 건 한국의 시인 진은영의 번역이다. ‘그림 에세이’라고는 하나 한 편의 거룩한 ‘서정시’라고 해도 무방할, 눈이 커지고 코가 붉어지고 입이 다물어지고 귀가 열리고 손은 바빠지는 그런 책이다. 왜냐,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여자들이 그것이 무엇이든 무언가를 ‘들고(holding)’ 있었으니까. 하여, 그림을 보고 글을 읽는 내가 그런 나로부터 내내 ‘들리고(raising)’ 있었으니까.

여자들은 무얼 가지고 있나. 전지가위를 들고 있는 여자가 있고, 현대미술에 의견을 가진 여자가 있고, 커다란 책을 안고 있는 이디스 시트웰이 있고, 커다란 양배추를 든 짜증이 난 여자가 있고, 궁정을 장악한 여자가 있고, 정원에서 꿀을 들고 있는 키키 스미스가 있고, 아픈 개를 안고 길을 걷는 여자가 있고,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가 있고, 나치 군인들에게 피살될 때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엄마가 있고, 굳세게 버티는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있다. 그래, 숱한 시간 동안 여자들은 집과 가족, 아이들과 음식, 친구 관계, 일, 세상의 일, 그리고 인간다워지는 일, 기억들, 근심거리들과 슬픔들과 환희, 그리고 사랑을 들고 있었구나. 그래, 그런 그들을 보는 내내 나는 그런 그들로부터 들리고 있었구나.

‘작가’ 마이라 칼만에게 ‘관찰’이라는 단어를 떼어 ‘여성’ 마이라 칼만에게 입력시킨다 할 적에 출력되어 나올 단어라 하면 그거 필히 ‘살핌’이리라. 느리고 더디게 그의 단순한 그림의 선과 짤막한 단문의 문장을 좇는 와중에 느닷없이 먼지떨이 총채 하나를 검색하여 사들인 것도 두루두루 주의하여 헤아려 보는 과정 가운데 내 ‘일’이리라. 멀리로는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서 가까이로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서 내가 알아보고픈 ‘인생’을 글과 그림으로 비유했다 할 적에, 그 깊어짐은 제 가계를 위아래로 털어본 일이라 할 적에, 아무렴 나는 마이라 칼만에게서 사람이라는 슬픈 역사의 ‘총체’를 맞닥뜨려본 것도 분명하리라.

그렇다면 한 여자로 나는 지금 무얼 가지고 있나. “책을 보는 여자(woman holding book)”의 고개가 아래로 수그러져 있다. “당신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들고 있군요. 한 권의 책을요. 무언갈 붙들어야 한다면, 바로 이것이죠. 사랑하는 친구여, 꼭 붙잡아요. 한 마디 더. 들고 있어도 되지만, 내려놓아도 돼요. 하지만 또 다른 책을 들겠죠.” 든다. 들린다. 얼마나 다행인가. 책상은 책을 더 담을 수 있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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