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안 인터뷰 -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
韓, 생산생태계 다양·제조 강점
美·中패권경쟁 속 역할 커질수도
조선·원자력 등 이점 무기 삼아
美의 첨단산업 경쟁력 활용해야
주력산업 약화된 것이 근본문제
中과 기술경쟁 차별화로 승부를
정부, 생산성 높여주는 환경위해
DOGE처럼 과감한 규제 개혁을
“트럼프 2기는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위기가 없으면 기회가 생기지 않아요. 특히 우리나라는 오히려 트럼프의 등장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는 국내 산업구조를 자극해 한 단계 점프할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글로벌 경제 통상 전문가인 정철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연구총괄대표 겸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2기 행정부의 출범을 한국경제가 도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2기 출범은 분명 한국 경제의 위기이지만, 한국이 다져온 생산 생태계와 제조 경쟁력을 고려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한국경제의 가장 큰 걸림돌인 ‘성장동력 부재’를 극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을 일주일가량 앞둔 지난 1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 FKI타워에서 정 원장을 만나 트럼프 시대 한국 경제 전망에 대해 들었다. 취임 후 상황은 전화 등으로 추가 입장을 들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경제정책의 특징은 무엇인가.
“지난해 11월 애덤 포즌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장은 ‘포트리스 아메리카(Fortress America)’ 미국 요새화를 이야기했다. 이민은 막고, 물건은 관세 장막을 높게 해 거래를 못 하게 하고, 금융 투자도 수수료를 부과하겠다는 거다. 미국 시장에 접근하고, 투자하려면 이제 수수료를 내라는 식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 보조금이라는 당근을 주면서 미국에 공장을 세워 일자리와 생산을 유도한 조 바이든 정부와 완전 반대다. 그 당근을 미국인에게, 미국 기업에 준다는 거다. 외국 기업엔 채찍으로 충분하다는 식이다. 채찍을 휘둘러 관세를 올리고 투자비를 내게 해도 알아서 미국으로 들어올 것으로 생각한다. 완전히 발상의 전환이다. 다만 제가 파악하기로는 보편관세를 시행할지 아니면 국가별, 품목별로 다르게 관세를 적용할지에 대해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것 같다. 인플레이션 등을 우려해 보편관세를 바로 전격 시행하지 않고, 상황을 봐가면서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관세로 채찍질하는 미국이 우리에겐 어떻게 기회가 되는가.
“세계 경제에서 첨단 기업이 몰려 있는 곳이 어디인가. 인공지능(AI)만 봐도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물론 중국도 많이 하고 유럽도 조금 나아질 가능성은 있지만, 결국은 미국 시장이 지난해도 그랬고, 올해도 나 홀로 잘나가는 시장이 될 거다. 반면, 우리는 중국에 들어가서 사업할 수가 없다. 다른 나라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만큼 미국 시장이 중요하다. 우리는 미국 시장에 물건을 파는 것뿐만 아니라 첨단 기술 분야에 대한 협력도 중요하다. 경제학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러닝 바이 두잉(Learning By Doing)’이다. 미국 시장 안에 들어가서 생산하는 것 자체가 시너지 또는 부수적인 효과들을 얻을 수 있다. 특히나 미국 시장은 트럼프 정부 이후 들어가기가 더 어려워지고 요새화가 됐다. 다른 곳은 이제 돈 내고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는 이미 보조금을 받고 들어간 거다. 우리는 바이든 정부가 주기로 했던 보조금을 앞으로 못 받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더 기회라고 생각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글로벌 경쟁구도에서 한국 산업은 어떤 승산이 있다고 보나.
“미·중 간의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나쁜 포지션이 아니다. 지난해 미국에 갔을 때 바이든 인사, 트럼프 인사를 만났을 때 한결같이 한 말이 ‘한국만큼 중요한 파트너가 없다’였다. 미국은 공급망 측면에서, 또는 경제 안보 측면에서 중국 제품을 계속 쓸 수 없다. 그럼 대안이 어디냐. 일본과 대만도 보겠지만, 한국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생산 생태계를 가지고 있으며 제조 강점을 가진 나라가 별로 없다. 우리 선박 유지·보수·정비(MRO)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우연이 아닌 거다. 한국이 경쟁우위에 있고 미국산 대체가 어려우며 꾸준한 수요가 있는 조선과 방산, 원자력 등 부문의 이점을 협상의 무기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배터리,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 중국산 차단 정책이 강력히 추진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한국이 이들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선점할 필요도 있다. 한국이 가진 이러한 강점을 잘 살리고 또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미래 첨단 산업의 기술과 생산성을 확보하려면 미국과 손잡아야 한다. 최대한 협력하면서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은 받아야 한다. 여전히 미국 산업 경쟁력, 특히 첨단 산업에서의 경쟁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다. 우리는 이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한국경제의 전반적인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내우외환은 맞다. 내우는 내수 침체, 외환은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제 통상 질서의 판이 바뀌는 상황이다. 다만 트럼프 정책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대응할 수 있고, 내수 침체도 단기적으로 재정 등을 통해 대처할 수 있을 거다. 제가 볼 때는 신성장 동력이 없고, 주력 산업이 많이 약화하고 있는 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산업 구조에 큰 변화가 없었다. 그만큼 잘했다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개선과 개혁이 덜 됐다는 것이다. 그런 것 때문에 지금 한꺼번에 위기가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과거 캐시카우 역할을 해오던 석유화학의 경우, 최근 중국의 공급과잉과 중동의 신규진입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변화와 개선이 잘 안 되거나 늦어진 점이 문제가 되는 거 같다. 가장 큰 위기 요인은 성장 동력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다. 사실 첨단 산업 쪽에서 우리가 연구·개발(R&D)을 적게 한 건 아니다. 그런데 창업이라든가 혁신 등의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업이 커나갈 수 있는 생태계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이스라엘은 물론 중국도 창업이나 혁신 생태계가 잘 만들어져 있다. 미국이 제일 잘돼 있다. 미국이 100대 유니콘 기업 가운데 60개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겨우 1개다. 정말 위기감을 느껴야 한다.”
―산업 구조를 발전시키고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산업 구조 같은 경우는 사실 민간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물론 기업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정부가 주도해 나가는 게 필요하다. 특히 첨단 산업 기술을 접목해 혁신하는 부문이 잘 안 돼 있다. 인구가 줄어들듯 산업 구조도 올드화된다. 결국 생산성을 높여주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정부와 정치권에서 해야 할 역할이다. 매번 이야기하는 규제 개혁, 규제 혁파다. 트럼프 정부가 정부효율부(DOGE)를 만들어 400개가 넘는 연방기관을 99개로 줄인다고 한다. 시사점이 매우 크다. 아닌 것 같은 규제는 과감하게 없애야 한다. 어설프게 개선하는 건 효과가 없다. 정말 꼭 필요한 규제만 있어야 한다. 시대는 도전적인 창업과 혁신을 요구하는데 제도는 안전성과 안정성을 추구하다 보면 따라갈 수 없다. 꼭 필요한 규제들로 기업들이 활동하기 좋은 조건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게 하려면 환경이 필요하다. 우리는 꽃과 열매는커녕 제대로 뿌리내리기조차도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 그런 것들을 해야 할 시기다. 한국 경제의 변곡점이다.”
―상법을 비롯해 기업 규제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규제들을 없애려면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나 정치권에서도 대기업이나 기업이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한다고 생각하는데 옛날이야기다. 요즘은 기업들이 경제에 기여하고 사회공헌 활동도 많이 한다. 기업의 기를 살려주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소수 대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됐고, 그로 인한 피해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상황이 많이 개선됐다. 문제점을 미화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기업 규모에 따른 차별적인 규제가 많다. 우리나라 말고 다른 나라에는 찾아볼 수 없는 규제다. 중소기업이 커가면서 중견기업이 되고 중견기업이 커서 대기업도 된다. 우리나라는 대기업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하는 상황이다. 대기업을 마치 사회악처럼 보는 그런 식의 규제들은 특히 없애야 한다.”
―국내 산업의 가장 큰 리스크가 중국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과거엔 중국의 국가주도 자본주의 성장 모델에 대해 공정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 경쟁력이 올라가 과거와 같은 불공정 논란만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우리로선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두 가지 중에 하나다. 기술력을 더 키워 경쟁에서 이기든가 아니면 차별화를 해야 한다. 직접 경쟁을 피하고 우리가 가진 다른 장점을 살리는 거다. 우리는 콘텐츠 등 문화적인 부분도 있다. 이런 것들까지도 포함해 차별화로 제조하고, 또 디지털 서비스에 문화를 가능한 선에서 융합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창의적으로 해법을 찾아야지 과거의 경쟁 구도에 사로잡혀 있으면 쉽지 않다. 무조건 머리 들이밀고 서로 깨지라고 싸운다고 해서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높을까? 별로 아닌 것 같다. 다른 창의적인 해법도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수출선도 다변화시켜야 한다. 예전에 생각지도 않았던 곳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금 중국이 들어가기 힘든 미국 시장을 더 적극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한국경제가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인가.
“정말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다. 단기적으로나 중장기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고비를 맞고 있다. 이 고비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정치권, 기업, 경제계, 국민이 다 합심해서 헤쳐 나가야 한다. 국민적인 공감대 속에서 우리가 혁신해 나가는 미래를 창조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혁신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다. 이를 위해 기업가 정신과 창업에 관심을 두고 필요한 지원과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 정 원장이 생각하는 기업은…
“삶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크리에이터’… 그에 걸맞은 대접 받았으면”
정철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연구총괄대표 겸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은 기업의 역할과 의미를 정의해달라는 질문에 ‘크리에이터’라고 답했다.
정 원장은 “기업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면서 우리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더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체”라고 했다. 이어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처럼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은 고통이 따르는데, 기업이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근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기업 지배구조 탓이라고 지적하면서 소액주주 보호 입법이 쏟아지는 데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정 원장은 “기업은 자본 투입과 생산성 제고 등을 통해 한국 경제 성장에 기여했으며, 질 좋은 일자리 또한 창출해왔다”며 “국민들도 이 같은 기업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경협이 2023년 말에 실시한 대기업 기여도에 대한 국민인식 설문도 소개했다. 설문에선 수출(90.7%)과 경제성장(88.0%), 투자(74.7%), 일자리 창출(71.0%), 혁신(71.0%), 국민소득 증대(62.9%) 등에서 대기업의 호감도가 높았다. 기업의 역할은 대외 우방과의 네트워크 및 관계 개선에서도 갈수록 비중이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 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경제인 다수가 초청받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 정치권의 당파를 초월한 외교를 경제계가 본격 구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경협은 올해 도전, 혁신 등의 기업가 정신을 전 국민에게 확산하는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미래 청년세대들의 기업가정신을 고취시켜 혁신기업 창업 등이 활성화되는 기업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1965년생인 정 원장은 서강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은 뒤 미국 조지아공대 경제학부 교수를 지냈다. 2007년에 대외경제정책연구원으로 옮겨 선임연구위원·무역통상본부장·부원장 등을 지내며 한국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KOPEC) 공동회장, 태평양무역개발회의(PAFTAD) 국제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무역협회 수석이코노미스트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위해 활동했고 2016년부터 2017년까지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통상자문관을 지내기도 했다.
이용권 기자 freeus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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