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쿠데타
■ 백이숙제찬(伯夷叔齊贊)
상나라 주왕 폭정에
제후였던 무왕 ‘거병’
완승뒤 천자에 올라
백성위해 어진 정치
역사적 정당성 품어
대대로 성군 존중받아

그러니까 제후는 통치를 위임받은 지역에선 임금이지만 천자의 임명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천자의 신하다. 천자는 왕이라고 불렸지만 제후는 공이나 후, 백 등으로 구분되어 불린 이유다. 그런데 무왕은 본래 제후였다. 그가 위임 통치하는 주나라는 천자가 다스리는 상나라 휘하의 여러 제후국 중 하나였다. 따라서 무왕은 처음부터 왕으로 불릴 수 없었다. 공이나 후, 백 중의 하나로 불렸어야 했는데, 그가 왕으로 불리게 된 까닭은 그가 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간의 사정은 이러했다.
제후인 무왕이 섬기던 천자는 주왕이었다. 주왕은 3000년을 상회하는 중국 왕조의 역사에서 4대 폭군으로 꼽힐 정도로 폭군 중의 폭군이었다.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것은 기본이었고, 어진 신하의 충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공자가 어진 이로 꼽은 비간이란 충신이 있었다. 그가 간언을 포기하지 않고 올리자 주왕은 그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 죽이기도 했다. 평화로운 방식으로는 폭정을 멈출 수 없는 지경일 만큼 주왕은 폭정을 그치지 않았다.
결국 무왕이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폭군 주왕을 토벌하고자 했다. 아버지 희백 창은 어진 정치를 편 까닭에 천하 인심의 3분의 2 이상이 지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희백 창은 천자의 신하인 제후가 천자를 칠 수 없다며 역성혁명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 무왕은 달랐다. 평화적 방도로는 주왕의 폭정을 끝낼 수 없다는 점이 이미 입증되었고, 무왕에게는 아버지 때부터 어진 정치를 해왔다는 정당성도 있었다.
3000여 년 전의 어느 날, 무왕은 제후 연합군을 이끌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거병하였다. 결과는 무왕의 완승이었다. 폭군 주왕은 제거되었고 제후였던 무왕이 천자 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상나라는 멸망했고 제후 나라였던 주나라가 천자 나라로 거듭났다. 역사는 이러한 무왕을 두고 성군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역성혁명이 정당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무왕은 역성혁명을 일으킴에 매우 두려워한 바가 있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역사는 지속될 터인데, 자신의 역성혁명이 전례가 되어 후세에 정당성 없이, 자기 이해만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빌미로 악용될까 봐 두려웠다. 조선시대 김시습이 “하늘이 무왕에게 명하여 상나라를 멸했다. 죄를 벌했다고는 하나 실은 상서롭지 않았다. 천년 이후 구실이 되었으니 안타깝다” 하며 통탄했던 그런 일이 일어날까 우려했다. 무왕의 역성혁명은 정당성이 충분했음에도, 무왕은 당장의 현실뿐 아니라 역사도 자기 삶 속에 품고 있었기에 그렇게 두려워하고 걱정했던 것이다.
사실 무왕의 역성혁명은 안팎으로 정당성, 그러니까 정의로움을 갖추고 있었다. 아버지 때부터 어진 정치를 행해왔고, 희대의 폭군을 제거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는 의로움을 실현하였다. 역성혁명 이후로도 내내 인정을 베풀었다. 그래서 무왕은 대대로 성군으로 존중되었고 그의 역성혁명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았다. 이는 그의 거사가 정의와 역사를 품은 역성혁명이었기에 가능했다. 성공한 역성혁명이라고 평가받으려면 이처럼 역성혁명의 주체가 정의로워야 하고, 역성혁명 당시에도 정의로워야 하며, 역사적으로도 정의로워야 했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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