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연말 연초는 정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어떻게 꾸릴지 골몰한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이후론 계엄 이야기가 온통 우리의 눈과 귀를 점령한 탓에 생각을 하나로 모으기가 힘들다. 우리는 개별자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므로 개인의 운명도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알게 모르게 개인에게로 스며든다. 그래서일 거다. 요즘 계속 심란하고 우울하고 걱정되며 움츠러든다는 사람이 많다. 나도 비슷한 느낌인데 이런 나날을 보내며 생각해 본다. 이 어지러운 시절을 지혜롭게 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서울 강남에서 책방을 하고 있다. 터치 몇 번이면 웬만한 필요는 쉽사리 해결되는 디지털 시대에 어쩌자고 동네 책방을 열었을까.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자는 생각을 마음 한가운데 품고 ‘생각의 숲’이 되자고, 그것을 북극성으로 여기며 9년째 책방 주인으로 살고 있다.
나는 어지러운 시절을 현명하게 통과하는 방법으로 ‘공부’에 생각이 가 닿는다.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책과 함께 살아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때일수록 공부를 통해 깊어지며 통찰력을 기르면 좋겠다. 쉽사리 휩쓸리지 않고 치우치지 않는 단단하고 깊은 눈을 갖는 것. 애초에 공부란 인생의 어느 특정한 시기에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사는 동안 평생 해야 하는 것이고 또, 한 해 한 해 나이 드는 것이 그저 늙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계속 공부하며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세상이 극적으로 변함에 따라 어제까지는 통하던 것이 더는 통하지 않아 당황스러운데, 아직 새로운 방법이나 길은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이런 때 필요한 것이야말로 공부하며 모색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생각을 지난해 12월 우리 책방에서 열었던 나태주 시인의 북토크에서 오프닝 멘트로 했다. 나태주 시인은 ‘풀꽃’이라는 시 즉,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외에도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시를 여러 편 쓴 ‘국민 시인’이다. 그는 내 이야기에 이렇게 화답했다. ‘폐문독서(閉門讀書)’. 본래 난세엔 독서라고.
옛사람들은 어째서 어지러운 시절을 독서를 하며 보내라 했을까? 어지럽다는 건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고, 이전의 방도가 더는 통하지 않게 되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길은 어디에 있는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해법은 어떻게 찾아지는가? 나는 책방 주인이 되기 전, 광고를 하면서 마케팅과 비즈니스의 해법을 찾는 일을 오래도록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게 이렇다. 해법은 인사이트에서 오고 인사이트는 질문에서 잉태된다고. 여기에 더해 지금껏 책을 읽고 책방을 운영하며 보니 책이란 하나의 질문이었다. 저자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몇십 년씩 어떤 질문을 붙들고 천착한 끝에 결론에 다다르게 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적은 것이 책이 되어 세상과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니 책을 잘 읽는 방법 하나는 그 책에서 저자가 던진 질문을 찾아내는 것이다. 물론 그 질문에 대해 저자가 내린 결론도 찾아야 하겠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것만으론 절반만 읽는 것이고 수동적인 독서다. 그럼 적극적인 독서는 무엇일까? 그 질문, 저자로 하여금 책을 쓰지 않을 수 없도록 이끈 질문을 스스로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그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던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무엇인가?’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차츰 나의 생각이 꼴을 갖추고 자리 잡는다. 물론, 이런 일은 빨리 단숨에 되지 않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이지 않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결실이 그렇듯 이런 느린 작업이 웬만큼 축적되고 토대가 다져지면 그때부터 자신만의 관점과 인사이트들이 비상하기 시작한다. 웬만한 정보는 인터넷과 인공지능(AI)이 알려주는 시대에 정말로 귀한 인사이트는 이렇게 생겨나고 쌓여간다.
요즘 가짜 뉴스 문제로 우리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가짜 뉴스가 점점 더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뭘까? SNS 등 달라진 미디어 환경이 문제의 중심에 있지만, 나는 또 하나를 주목한다. 이성(理性)의 약화 내지 무력화.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저서 ‘인간다움’에서 공감과 이성, 자유(혹은 자율)가 인간다움을 이루는 세 기둥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갈수록 이성이 힘을 잃는 것 같다. 이성적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제대로 들여다보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하지만 하루하루 바삐 사는 우리에겐 그럴 시간도, 에너지도, 의사도 부족하다. 헤드라인만 보고 빨리 판단해 버리며, 점점 더 사이다를 찾고 사이다에 반응한다. 의도적으로 가짜뉴스를 ‘창조’하려는 이들에겐 너무나 좋은 토양이 되는 거다.
운동을 처음 시작하면 트레이너들이 의외로 호흡을 강조한다. 깊게 들이쉬고 내쉬라는 거다. 한데, 깊은숨을 빨리 쉴 수는 없다. 천천히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어야 한다. 이성의 작용도 비슷한 데가 있지 않을까? 단박에 휩쓸려 빨리 믿어버리지 않고 찬찬히 살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는 거다. 그렇다면 천천히, 깊이 생각하는 훈련은 어떻게 할까? 내가 아는 좋은 방법 하나는 단연코 책 읽기다. 특히, 요즘 같이 생각이 집중되지 않는 때 ‘국민 시인’도 ‘폐문독서’를 말하지 않나?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지금 당신 책상엔 어떤 책이 놓여 있나? 당신은 무얼 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나?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