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미 소설가

오랜만에 참석한 출판 시상식
나이도 분위기도 너무 달라져
예전엔 질펀·끈끈함이었는데

이제는 화려한 상큼 모드 물씬
내년엔 ‘못 오겠다’ 생각하다가
‘와서 자극받겠다’로 마음 돌려


코로나19로 인해 멈췄던 정기 행사들이 2023년부터 대부분 재개되었다. 어느새 모임에 나가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 꼭 필요할 때 외에는 칩거하는 중이다. 요즘처럼 생각이 첨예하게 갈릴 때는 가급적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말, 한 출판사의 시상식에 가게 되었다. 내 소설을 낸 출판사인 데다 담당자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근 5년 만의 참석이었다. 출판 불황 시대에 프레스센터의 넓은 공간을 빌려 7개 부문을 시상하는 기개가 감동스러울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작가들과 어울려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제법 큰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 무한대로 주문이 가능한 뒤풀이가 펼쳐지는 동안 수상작 인세가 오늘 비용을 충당해야 할 텐데 하고 괜한 걱정도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우리 테이블에 함께한 8명 남짓한 작가와 다른 테이블의 수십 명 참석자가 한 세대 또는 반 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5년 전과 확연히 달라진 풍경이었다. 그때만 해도 참석자들의 나이 차가 많지 않았는데, 그날은 우리 테이블이 ‘구세대의 섬’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확연한 연륜을 뿜어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중심축이 확실히 아래로 내려간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다 우리 자리에 끼어 앉은 젊은 작가는 25세에 불과했다. 우리보다 나이가 반 이상 적은 그 작가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의 이공 계통에서 공부한 수재였다. 우리 중 누군가가 “여기 있는 거 재미없겠다. 다른 자리로 보내주자”고 했고, 그 작가는 단 한 번의 사양도 없이 바로 일어났다. 이후 ‘선생님좌’가 확고해진 우리 자리로 몹시 어린 작가들이 인사하러 왔다.

수재 작가보다 열 살이 적은, 베스트셀러 장편소설을 낸 중학생 작가가 인사하러 왔을 때 우리 자리에 있던 선생님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연예인들이 오래전 데뷔한 선배를 ‘조상님’이라고 부른다는데, 그 조상님들이 느낀 기분과 비슷했을까.

1994년에 첫 책을 낸 이래로 다수의 서적을 출간하며 여러 출판사를 경험해본 내가 그날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우선, 편집책임자들의 나이가 확 낮아졌다는 점이다. 그 출판사는 5년 사이에 여러 임프린트를 개설했는데, 편집책임자들이 이전보다 열 살 이상 적은 30대가 주를 이루었다.



우리 사회 여러 분야를 돌며 취재를 많이 한 내 경험에 비춰보면 직종에 따라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되기 마련이다. 개개인의 차이야 있겠지만, 패션부터 말하는 것까지 그 분야만의 특색이 있다. 그래서 ‘출판사 분위기’라고 하면 대충 짐작하는 바가 생겼다. 그런데 그날 출판담당자들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출판사 뒤풀이 풍경은 ‘질펀함과 끈끈함’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날 수상한 신예 작가들, 그들을 위한 축하객들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지루한 말 타래를 이어가다 알코올에 확 취해버렸던 이전 축하객들과 달리 ‘화려한 상큼 모드’를 유감없이 구사했다. 테이블을 돌며 술을 권하고, 다른 자리까지 불려가던 이전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뒤풀이 장소에서 느닷없이 몇 년 전 관람했던 패션쇼가 떠올랐다. 해외 유명 패션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 전시회와 컬래버한 패션쇼였다. 여러 개의 전시공간에 관람객들이 나뉘어 앉아 있으면 모델들이 각 방을 거쳐 가며 워킹을 선보이는 형식이었다. 패션쇼가 끝나고 로비에서 핑거푸드 뷔페를 곁들인 와인 파티가 열렸는데, 드레스코드 ‘블랙’을 충실히 따른 2030세대를 보고 중심축이 옮겨갔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평상복 가운데 검은색을 입고 온 베이비붐세대나 X세대와 달리 블랙이되 파티복을 연상케 하는 복장의 MZ세대는 파티를 완벽히 즐길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날 시상식 뒤풀이에서 Z세대 축하객들은 자리를 옮겨 다니며 술을 권하는 대신, 함께한 이들과 조곤조곤 대화하며 화사하게 웃었다. 드레스코드는 없었지만, 다들 성장을 하고 한껏 멋을 낸 모습들도 인상적이었다. 임프린트 편집 담당자들의 패셔너블한 차림도 달라진 풍경이었다.

문예창작학과 재학 시절 선배들이 ‘방송, 기자, 광고, 출판’ 네 분야로 진출하는 걸 지켜보며 우리들의 진로를 예상하곤 했다. 그중에서 ‘출판사’를 가장 기피했는데, 이유는 ‘너무 정적이다. 남을 서포트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 출판시장이 힘들다고 하지만 디지털출판에 글로벌 진출까지 매우 다양하게 뻗어 나가며 능력 있는 기획자들이 엄청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사회에 나와서 알았지만, 네 분야 가운데 출판 쪽이 ‘독립해서 일하기 좋은 전문성’을 쌓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그렇더라도 ‘출판사 분위기’에 대한 선입견은 여전했는데 그날 시상식과 뒤풀이에서 그 생각이 여지없이 깨졌다.

1차가 끝나고도 2차, 3차까지 이어갔던 선생님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른 자리들은 늦게 합류한 이들로 인해 활기가 넘쳐났다. 아직 1차도 끝나지 않은 뒤풀이 장소를 빠져나오는데, 5년 전보다 확 젊어진 참석자들이 뿜어내는 생동감 넘치는 화사함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20여 년 전 나와 대학원을 같이 다닌 모 작가도 “와, 위화감 느껴지네”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틀을 깬 신예 작가, 발랄 발칙한 작가’라는 칭송이 따라다녔던 그가 “내년부터 시상식에 못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우리 둘이 의기투합했다. “충격받고 자극받으려면 와야겠다”로. 숫자에 불과한 나이를 벗어던지고, 중심 지키며 열심히 쓰자고 다짐하면서.

이근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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