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개혁 또 방치는 국민 무시 경제의 최대 악재는 정치 불안 개혁안 걸고 국민 판단받아야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 정치 개혁을 부르짖던 목소리들이 힘을 잃고 있다. 대통령제를 ‘정치 마약’ 같은 제왕제라고 비판했다. 이구동성 “개인의 선의를 기대하는 정치는 접어야 한다”(국회 원로모임)고 했다. 그나마 정치 실패를 성찰할 계기라고 각성했고, 근본적 변혁이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듯했다. 불과 두 달 새, 그게 아니다. 온통 조기 대선을 기정사실로 ‘다음은 누구냐’ ‘어떻게 해야 이길까’로 휩쓸려가는 소리뿐이다. 개헌은요? 개혁은요? 이런 따위는 공허한 질문이 돼버렸다. 다수파 더불어민주당부터 “내란 극복이 우선”이라며 말문을 막는다. 유리하다 싶으니 권력만 잡으면 끝이란 생각일 게다.
이게 최선인가. 두 패로 나뉘어 광장에 진을 친 채 정권 잡기에 시동을 걸고, 허언뿐인 정치로 현혹하는 게 제 할 일을 다 한 것인가. 민주주의의 회복력은 탄핵 심판과 내란혐의 재판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오류를 수정하는 자가 치유력을 보여줘야 온전한 회복이다. 불안정성을 바로잡지 않으면 시스템 오작동과 탈선적 권력 사용 욕구는 언제든 재발한다. 물론 완벽한 시스템이란 없다. 제도, 사람, 두 가지가 모두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 탄핵소추와 구속 사태, 야당의 점령군 같은 정부 무력화 공세를 지켜보고도 구조적 문제를 내버려두면 대중의 망각증에 편승한 진영 대결만 난무할 게 뻔하지 않은가.
대부분 1987년 개정 헌법에 문제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 체제에서 대통령 8명 중 3명이 퇴임 후 구속되고, 3명이 탄핵소추를 당했으면 더는 ‘시효 연장’이 어렵다는 데 수긍한다. 대통령 권력 분산만이 관건인 것도 아니다. 입법부 권력이 행정부, 사법부까지 흔들 줄 누가 상상이나 했나. 대통령제에 의원내각제 요소가 병합된 불완전한 삼권분립이 화근이었음을 모두가 안다.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과 의회가 모두 승자독식으로 뽑히고, 국민 대표성을 두고 충돌하면 완충할 민주주의 장치가 없다’(후안 린츠)는 게 현실이다. 견제·균형은 수사에 불과하고, 증오정치가 타협을 압살하며, 국민 통합이 아닌 분열만 남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남은 한 축, 사법 시스템마저 정치 구도서 자유롭지 않아 불공정 시비에 휘말리면 그야말로 내전, 파국인 시점이다.
불편한 진실을 꺼내놓고 제대로 다퉈야 할 때다. 현행 헌법은 각 계파 대표로 구성된 8인 정치회담과 국회 의결, 국민투표를 거쳐 공포까지 4개월 만에 끝냈다. 사전 준비가 있었다지만 “대통령 직선제의 3공화국 헌법(박정희 정부)을 상당 부분 참조한” (이한동) 덕분이다. 시대착오적인 조항이 수두룩한 이유다. 대통령 5년 단임제도 장기 집권 방지 차원보다는 정략의 산물이었다. 김영삼·김대중 중에 누가 먼저 대통령이 되더라도 자기 차례가 빨리 오도록 합의했다는 게 후일 다수가 증언한 진실이다. 개헌론이 끊이지 않았으나 번번이 무산된 것도, 대권에 혈안이 된 정략 때문이었다. 2017년 탄핵 정국에서도 그러했다. 정치가 의무를 해태하면 국민 무시다.
헌법 개정과 공직선거법 등 관련 법 개정이 모두 필요한 일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이건,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이건, 의원내각제이건, 권력 구조를 놓고 백가쟁명의 대논쟁이 벌어져야 한다.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에 대한 욕구가 아직 상당하지만, 연립정부 방식의 유럽 나라들이 숱한 정치 위기에도 헌정 중단의 최악 상황에 이르지 않는 이유를 상기하는, 무제한 격론이어야 한다. 중대선거구제 전환, 국회의원 해임의 국민소환제 도입 등 국회 개혁 방안도 일전을 벌여야 할 과제다. 모든 게 향후 한국 정치를 좌우할 의제들이다.
여야가 대선전 같은 중도층 잡기 경쟁이라는데, 실상 경제와 민생을 짓누르는 최대 요인은 정치 불안정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더 절실한 것은 실용주의가 아니라, 그간 보였던 독점·불복의 정치를 불식할 자기 쇄신 의지다. 국민의힘이 먼저 주창해야 할 것은 기득권 옹호가 아니라 보수 혁신의 비전이다. 당장 개헌·개혁의 시간표와 항목을 내걸어야 한다. 그걸 보고 누가 양극화 정치에 편승하려는지, 누가 폭군의 권력을 바라는지 국민이 판단하게 해야 한다. 그게 탄핵 정국의 또 다른 화두여야 한다.